어릴 때 아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 이었다"
6.25때 큰아버지 내외 분과 월남한 아버지는 3.8선이 막히고 돌아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미 결혼을 했고 오빠 세명을 낳은 상태에서 이북으로 돌아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와는 연애로 결혼을 하셨고 첫 아이가 딸이기를 소망했다.
원하는 대로 딸아이를 낳자 "이루어서 기쁘다"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주셨다.
이룰 성, 기뿔 희.
희자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대부분 계집 희자를 이름으로 가진 것과 많이 다르듯이, 집에서의 교육도 "여성 우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이북의 "초대 장로"집안의 기독교 신앙이 아버지를 딸, 아들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약한 여자를 우대하는 가정교육을 시키게 하였던 것 같다.
경기도의 소읍에서 "제재소"와 "음식점"을 하던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이었다.
가끔 아버지를 떠 올리면 가족을 데리고 조그만 냇가에서 "닭죽"을 끓여서 먹고 나를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목욕도 하던 기억이 최초의 부끄러움으로도 남아 있다.
4~5살 된 나를 옷이 젖는 다고 팬티를 벗겨서 데리고 목욕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기억은 아버지는 목욕을 갈 때마다 나를 데리고 갔었다.
모두 남자 어른들이었는데 나만 여자 아이였다.
남탕에 대한 기억도 가끔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늘 "우리 딸이 최고야. 우리 딸이 제일 예뻐" 하셔서 나는 내가 정말 예쁜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때 서울에 전학을 와서 처음 느낀 나의 정체성은 "촌년"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을 사귀면서 내가 "가정교육'이 배제 된 '사랑"만을 받고 자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서울에서 알게 된 친구들 중에는 어머니가 군수의 따님인 아이도 있었고 , 전라도 작은 섬을 갖고 있는 지방 부호의 딸도 있었다.
그 친구들의 집에 다니면서 나는 독학으로 사회 예절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골 촌년이었던 나는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를 해서 인지 서울에 오자마자 계속 반에서 일등을 했다.
진명여중 입학식을 마치고 "삼일당"에서 나와서 길로 나섰는데, 좁은 길에는 입학식에 참석한 학생과 학부형으로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
이때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리시더니..." 성희야! 저기 봐라 사람들 참 많지?"
아버지는 살아 계시면 87세인데 키가 178cm의 장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도 벌써 20년이되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32년이 되었으니 ,아버지 일생에 가장 혹독한 외로움과
육체적인 고통과 가난을 겪으신 것은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난후 돌아 가실때까지 였었다.
이북에서 부유하게 자랐으나 아버지 역시 어머니의 사랑은 큰아버지에게 뺏기고 . 할머니 손에 자라서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받고 크셨다.
큰 아버지는 일본의 전문대학을 졸업하시고 작년까지 "가축병원'을 운영하신 수의사였다.
아버지는 어려서 부터 말썽쟁이고 ..초등학교 6학년때 집의 소를 장에 내다 팔았다고 큰아버지는 지금도 남편에게 말씀하곤 한다. 우리 시아버님에게도 말씀하시고.
고등학교도 여러 번 전학다니다 겨우 졸업을 했다고 하니....의지력이 약하고 정이 많고 경제력이 없어서 평생을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 가신후 아버지는 여자문제로 여러 번 나를 가슴 아프게 하였다.
친정 부모가 없는 나는 아이를 낳을 때나 , 큰 수술을 해도 친정에 알리지 않았다.
말년에 "동맥경화증'과 " 신장암"과 "고혈압'으로 임종하기전 한 달을 신촌의 세브란스병원에 계셨다.
나는 그때 오른 쪽 폐를 절제하는 큰 수술을 했기 때문에 ,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으로는 일생을 소비한 아버지가 미웠으나 ,자식의 도리로 매주 토요일 서울로 가서 함께 살고 있는 새 어머니를 잠시 쉬게하고 아버지 옆에 있었다.
말기암으로 "몰핀"을 요구하는 대로 주사해 주었으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으로 괴로워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도 나는 마음이 아프지가 않았다.
아!
아버지.
당신의 큰 딸인 내 앞에서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시려고 입을 꼭 다물고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으면서 말씀하셨다.
" 성희야! 미안하다. 고맙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아버지 친구는 딱 한 분이 오셨다.
추석을 바로 뒤에 하고 있어서 문상객이 더 없었던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어버지의 고통을 보면서 내 마음은 그대로 미움이 굳어 있어서 속으로는 평생을 낭비한 댓가를 받는 거라고 생각했었던 못된 딸이었다.
나는 수술한 몸으로 매주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서 할 도리를 다한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일생을 살아 오면서 늘 들어 오는 "밝다"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맑다" "순수하다"는 모두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받은 유산임을 깨달았다.
유난히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나는 에레베이터안의 거울속에 비친 내 모습속에 아버지의 모습을 보곤 자주 놀라곤 한다.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았던 아버지.
자식들에게 존경 하는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역시 당신의 일생을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곤혹스러웠을 때가 많았으리라.
시아버님과 나이가 같으신데 (87세) ,시아버님은 아직 건강하시며. 교육계에서 정년을 하시고 조그만 중소기업을 경영하시고 있다.
아버지 장례식 때 큰 돈을 부주금으로 가지고 오셔서 쓸쓸한 빈소를 보고 , 셋째며느리의 친정이 보잘 것 없고 가난한 것을 알고 그때부터 나를 당신의 친딸로 생각하신 시아버님.
나는 두분의 일생을 비교하게 되었고 친정 아버지의 일생이 너무 덧없어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 세월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물려준 , 솔직하고 정많고 따뜻한 마음으로 인하여 시댁어른들에게 사랑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 돌아 가시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에서 벗어 나는데 10년이 걸렸다.
가장 큰 이유는 치명적인 여자 문제를 맏딸인 내가 해결하게 한 것 때문이었다.
우여 곡절 끝에 인천에서 만난 여인과 말년을 보내시다 돌아 가신 아버지.
아버지로 인해서 가장 큰 피해자는 막내인데 군 제대 후에 취업을 하고 작은 누나와 살면서 월급을 받으면 아버지 잠바를 먼저 사드리고 ,자기 옷을 사던 착한 막내 동생은 지금 대기업의 이사가 돼있다.
막내는 신입 사원 면접때 꼭 이런 질문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나?'
당신의 죄로 여동생이 많이 아프고 혼자 살게 됐다고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병원에 입원한 작은 딸을 열심히 문병을 다니던 아버지.
아버지!
못된 딸이 결혼을 한지 30년이 됐습니다.
저보다 착한 아들을 둘 두었는데 잘 자랐습니다.
아버지!
너무 오랫동안 미워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으로 저를 키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