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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누나! 우리 큰누나!

모과 2008. 3. 29. 17:54
누나!

누나 이미지는
자신이 만들어 갑니다.

장점이 많은데 주장이 커서
항상 손해 보잖아.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 하잖아요.]

며칠 전 막내 동생이 전화로 내게 한 말이다.

중학교 과학 교사를 (물상) 끝으로 조직 생활을 하지 않았았던 나는
나이에 비해서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것을 서점에서 몇 개월 일을 하면서 깨달았다.
서점의 매출이 부진한 것이 안타까워서 나의 생활을 올인 했었다.

처음에 직원들은 타성 이랄까?
세상 조직이 대부분 그런 가 ?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계산적으로 일을 했다.
**동래점을 거쳐간 수습사원과 알바...그리고 일 잘하는 몇 사람.

그러나 , 그것은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몇 달 후에 알았다.
지금 우리 직원들은 나와 정들어서 사이 좋게 잘 지낸다.
나는 내 입으로 내 직원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고 부딪치고 ,싸우기도 하고(가끔 덤벼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정이 들어서 손 발이 척척 맞는다.


나는 25세에 경기도 평택의 한 남중에서 교사를 하며 하숙 을 하고 있었다.
수업 중에 어머니가 교통 사고를 당했다고 연락을 받았다.

적십자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영안실]에 안치 되었고 ,아버지는 나를 부등켜 안고 울음을 터트리셨다. 어머니는 45세의 젊은 나이였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절박한 순간이 왔다.

아버지는 한 눈을 백내장 수술을 하시고 한달 후에 다른 눈의 수술 날짜를 잡아 놓은 상태였다.
이미 수술한 눈은 실명을 했고, 나머지 눈도 수술을 해봐야 한다고 한 상태였다.
한 살 아래 여동생은 병원에서 퇴원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큰 남동생은 군에 간지 3개 월이되었고 ,9월 30일에 돌아 가신 엄마는 사고 당한 채 그대로 냉동실에 보관되었다.
큰 남동생이 와서 엄마인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7일 간을....(국군의 날이 있어서 관보가 늦게 전달 되었다)

이북에서 월 남을 해서 친척도 없고, 막내는 고2 여서 멍한 표정으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교육열으로 막내는 당시는 드물게 사립초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반장을 했던 우수한 학생이었다.
고2 , 이학기 때 어머니의 교통 사고를 보고 ,고3을 방황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 장로님의 권유로 장지도, 관도,내가 정해야 했고, 산소까지 온 문상객에 대한 음식은 여신도회에서 준비해 줬다.
* 나는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 7번 기절을 했었다.

신앙이 신실했던 어머니는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다.
전 집사님들이 소복을 입었고. 청년들은 결근을 하고 어머니의 관을 운구했다.

평생을 성실하게 , 신용으로 생활했던 어머니!

교회 갈 때는 제일 좋은 옷을 곱게 차려 입고 행복한 모습으로 가셨다.
경기도 탄현 [기독교인 묘지]에 안치 된지 32년이 흘렀고 아버지도 , 어머니 옆으로 가신지 20년이 되었다.

막내 동생과 나는 외모도 많이 닮았지만 ,성실성과 신용을 목숨같이 아는 것과 독함도 많이 닮았다.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돌아 오니 엄마가 막내를 낳아서 옆에 누여 놓은 게 가끔씩 영화의 장면 처럼 떠 오른다.

엄마가 돌아 가시고 작은 누나와 10년을 살다 좋은 올케를 만나서 결혼한 막내.
막내 동생에게 작은 누나는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정많고 따뜻한 사랑을 자식에게 준 부모님들.
우리 형제들은 다 정 많고 ,서로 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다른 집과 좀 다르다.
남편도 그것은 부러워 하는 점이다.

체격은 크지만 몸이 약한 큰 누나, 형제 중에 제일 작은 (158cm) 작은 누나,를 두 남동생들은 어느새 50이 넘어서 오빠 같은 마음으로 돌보고 있다.

막내는 특히 작은 누나를 [누나야!]라고 부르나, 여동생은 막내를 태양같이 의지 하며 살고 있다.

"남들 다 자랄 때 뭐하고 배만 나왔어. 예쁜 우리 누나.'
여동생은 나와 다르게 생기고 마음이 약해서 싫은 말을 못하고 ,음식 솜씨가 아주 좋다.

큰 남동생은 누나들 집에 오면 ,특히 우리 집.
"누나! 더 자야 하는 데 . 몸은 어때? 나 때문에 일어 난 거 아니야?'
몇 년만에 온 동생에게 밥을 못해 주고 식당에서 사주어도 ...
누나! 우리 누나!
건강 조심해.
마치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 가서 다정히 말해 준다.
나는 보기와 다르게 큰 수술 두 번과 3년간을 결핵약을 먹으며 [결핵성 늑막염] 투병을 한 적이 있다.

막내 동생 , 초등학교 부터 머리에 끈을 동여 매고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아무 배경 없이 [자수 성가]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우리 3형제들 모두에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하고, 50이 넘어서 안정 된 생활을 하게 하는 것 같다.
여동생은 평생을 착하게 살아서 큰 아버지의 상속녀가 되어서 노후가 걱정이 없게 됐다.
여동생만 독신이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져도 형제 앞에서 늘 겸손하고, 다정한 막내동생.
요즈음 생각지 않은 일로 힘든 상황인데 ..막내는 전화로 따뜻하게 말하며
..내가 너무 강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업 실패 후에 나의 여린 본성은 가슴속에 묻어 두고, 독하고 강하게 마음 먹지 않았으면 15년의 힘든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15년간 내가 입는 모든 옷을 우편으로 보내준 여동생.
큰 아들이 서울에 있는 동안 , 지금까지 주말이면 최상의 손님으로 접대해 준 고마운 여동생.

큰 남동생이 힘들게 해도 두 아들 잘 키우고 ,맏며느리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큰 올케.

막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도록 뒷바라지 잘한 막내 올케.

모두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
앞으로 살면서 동생들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다 갚을 것이다..

막내야!
누나는 이제 투박하고 약간 전투적인 모습을 버리고 ,본연의 나의 모습을 찾기 시작하였다.

처녀 시절!
누구에게나 맑고 밝다는 소리를 들었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과 보통의 체격으로 돌아 갈 것이다.

너의 누나들에 대한 사랑을 늘 고맙게 생각한다.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자랑 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