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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만들며 사는 우리 가족 2

모과 2007. 10. 29. 23:57
LONG
사랑하며 삽시다.
ARTICLE

대여점은 개점하자 마자 잘되었습니다., .개업 할 때 빌린 돈의 이자와 월세를 제하고도 300만원은 남았습니다.

미국에 이민 가 있는 시동생이 형만 들어 와서 하던 공부를 마저 하라고 했습니다.

대여점이 생각보다 잘 되자 남편은 혼자 중얼 거렸습니다.

"이것은 기적 같은 일이야..."

후회를 하는 것 같았으나 이미 벌려 논 일들이 컸던 것 같습니다.

 경남의 소도시의 농공단지에 벌꿀을 넣는 상자를 만든다고 도에서 대출을 받는데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30년만에 만난 초등학교 친구와 ...부산 범일동 모 호텔 커피숍에서 오다 가다 만난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남편을 대표로 해서 대출을 받았는데.....

 

어느 날 새벽 아파트 초인종 소리에 깨서 나간 남편은 그 길로 바로 구속 되었습니다.

구속 되는 순간에도 집에 전화를 해서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집에 가서 자세히 말해 줄께"

그 후 재판은 일년 가까이 계속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제일 먼저 면회를 하고 와서 상점 문을 열었습니다.

면회를 가면 남편은 눈에 눈물이 비치며...."미안하다" 하였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남편은 만진창이가 된 몸과 정신의 회복을 위해서 시골 고향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남편만 보면 울화가 치밀고 , 그여자와의 돈 계산 관계가 끝나지 않았는지 계속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있는 돈을 모두 증권으로 날리고 화병과 간경화가 겹쳐서 사망하였습니다.

남편은 시아버님께 크게 꾸중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 갔습니다.

 

몸을 회복한 남편은 인척의 소개로 대형마트에 [가공 즉석 식품]을 납품하게 되었습니다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경북 구미까지 가서 식품을 받아다가 구미의 소형, 대형 마트부터 매장의 매대까지 깔아 주고 내려오면서 대구, 마산, 울산, 부산의 마트에 모두 진열까지 해 주고 옵니다.

졸음 운전을 할 까 무서워서 그때까지 먹은 음식이라고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우동 한 그릇 뿐이었지요

오후 6시에 집에 와서 혼자 소주 한 병과 저녁을 먹고 바로 쓸어져서 잤습니다.

6개월을 지나자 남편은 그만 두고 싶다고 했습니다.

매달 500만원의 적자가 났습니다.

시식 하는 아줌마 4명, 운전 기사 1명, .자동차 기름값.

그동안 냉동탑 차만 3번을 바꿨습니다.

결국 1년반 만에 빚만 지고 그만 두었습니다.

사무실이 형식적으로 필요하고 팩스도 받고 하기 때문에 제 상점으로 사업자 등록을 했습니다.

제가 대표로 되어 있어서 저만 빚쟁이가 됐습니다.

우리 부부는 자주 다투었고 아이들은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 때문에 인연이 아주 끓어 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정 많은 시댁 식구들과 헤어 질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도 큰 이유지요.

그 후 하는 것 마다 실패를 하고 이용을 당하던 남편이 적성에 맞는 일에 취직을 했습니다.

 

전국 대형 마트에 21개 지점을 가지고 있는 서점에 취업을 한 것입니다.

부산의 끝 동네 금곡에서 김해까지 6개월을 막내 동생보다 어린 점장에게 일을 배우고 본사 직원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영남의 직원을 돌보는 직책으로....

 

4. 가족의 사랑을 한 사람에게 몰아 준다.

 

큰애는 서울로 진학을 했고 4년간 장학금을 받았고 방학중에는 아르바이트로 학기중의 용돈을 벌었습니다.

큰애가 4학년일때 막내가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해야 했습니다.

가정 형편을 안 막내는 복학을 1년 미루고 대형마트 [나이트]에서 일년을 일했습니다.

* 나이트: 밤 11시 40분에 출근하여 다음 날 아침 8시에 퇴근하는 마트의 직원들,대략, 8명정도가 물건을 깔고, 팔고, 계산 까지 합니다.(심야 영업)

막내는 일년 동안 형에게 월 70만원을 보냈습니다.

학원비와 용돈이었지요.(큰 애는 졸업 할때까지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큰 아들이 무사히 졸업전에 취업을 하고 막내는 복학을 했고 이번에는 형이 동생에게 월 70만원씩 보냈습니다. 하숙비와 용돈이었지요.

 

저는 그동안 불황기에 접어든 [책 대여점]을 그만두고 남편 회사에서 하는 전국 대학생을 위한 책 할인 행사 진행자로서 전국 10개 대학에서 책을 팔았습니다.

낯선 도시의 모텔에서 자며 일 주일에서 이 주일씩 대학에서 책을 팔았습니다.

매번 좋은 매출을 내는 저를 모교인 [이화 여대]에 와서 행사를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이화 여대를 방문한 사장님은 저를 좋게 평가하셨는지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한가? 젊은이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데..." 하였다고 합니다.

 

....올해 6월8일에 부산에서 개점하는 서점 점장으로 발령을 내 주었습니다.

*남자도 대부분 퇴직하는 56세의 할머니가 다 된 나이에 너무나 감사한 선물입니다.

 

* 그 동안 큰아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계열사에 최종 면접 수석으로 합격 하였으나 업무가 평생 가기에는 적성에 맞지 않고 특히 멘토가 힘들어서 10월에 그만 두고 다시 모 은행에 합격하였습니다.

 

강남의 중앙에 위치한 최신식 건물에 근무 할 때는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 가던 아들이 서울 변두리 시장 앞에 위치한 은행에서 일하고 있을때 너무 행복하다고 합니다.

함께 일하는 선배나 동료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며.....일도 적성에 맞는게 큰 다행입니다.

 

며칠 전 매일 좋은 실적을 내는 아들을 위해서 회식을 해 주면서 입사시 최종 면접 수석이라는 말씀을 해 주었답니다.

 

5. 가족의 이름은 다른 말로 사랑입니다.

 

앞으로 일년은 지방대학에 다니는 막내를 위해서 힘을 모아 줄 겁니다.

큰애는 지난 여름 방학 때 동생을 서울로 불러서 신림동 고시촌에 방을 정해주고 두 달간 생활비와 학원비를 내주었습니다.(큰애는 은행 숙소에 있습니다)

막내가 잘 되야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하다며....

 

저는 큰애에게 해 주었듯이 매일 신문을 모아서 이슈별로 스크랩을 하여서  B 4용지에 붙여서 일주일에 한번 씩 막내에게 보내 줄 겁니다.

싸이월드 미니 홈피를 통해서 자주 막내와 글을 주고 받으면서 논리적인 서술을 익히게 할 겁니다.(물론비밀이야로)

 

남편은 그 동안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평생을 살아 가면서 갚는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살던 집은 두 번 압류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남편이 구속 되었을 때 였는데 시아버님이 방 두개의 아파트를 구하라고 하셔서 월세로 들어 갔습니다.

두 번째는 작년 큰 애가 첫 직장을 그만 둘 때인데 신용대출을 받아 주어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월세로 이사를 했습니다.

큰 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상한 남편의 이를 보고 500만원의 비용을 카드로 결재 해 주었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한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을때 나머지 가족이 힘을 모아서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가족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남편은 광주에서 대학 행사를 하고 있고, 큰아들은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고 있고, 막내는 대전 유성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산의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를 태운 인생이란 기차는 긴 터널을 뚫고 밖으로 몸을 반쯤 들어 내며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까지 오늘을 열심히 살며 사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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