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명절때만 되면 시골의 할머니,할아버지댁을 찾아가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큰 아버지와 단 둘이 월남한 아버지와 큰 아버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더구나 큰 집에는 사촌 형제가 없어서 ,명절은 늘 외로왔다.
충청도 대가족의 셋 째 아들과 결혼을 한 후 나는 오랜 소원을 풀었다.
시고모가 다섯 분이고 시할머니와 시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시고,시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은 교직에 계셨다.
남편 형제만 일곱으로 5남2녀였다.
결혼후에도 우리만 서울에 살았고 대부분의 친척이 대전의 한 동네에 모여 살았다.
시부모님의 집을 중심으로 ,뒷편에 작은 집이 , 왼쪽으로 난 길에서 좀 떨어 진 곳에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이 살았고,오른쪽에 넷째 시고모님과 막내 시고모님이 사셨다.
모두 단독 주택이다.
그리고 원래 본가......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오직 농사로 마을의 대부분의 전답을 재산으로 모으신곳....예산군 덕산면 외라리 박씨가문.....마을의 보건진료소 여소장은 마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외라리의 박씨 가문, 내나리의 O씨 가문, 복당리의 O씨 가문....이름도 정겨운 시골집은 7대째 내려오는
풍수지리가가 감탄을 하고 간 집터이다.
본가 130년...할아버지와, 아버지, 시아주버니 두 분이 태어나셨다.
사랑채 95년....황토방으로 안채가 좁아서 지으셨다고 했다.
좌청룡,우백호의 날개 역할인 바깥채: 65세; 큰 아주버님 연세와 같다. 그곳에서 큰 시누이와 남편과 시동생이 태어 났다.
할아버지 돌아 가시고 15년을 비어 두었던 안 채에서 주므시며 큰 아주버님은 집을 조금씩 조금씩 손수 고치기 시작하였다.
안산의 큰시누이 남편인 아주버님도 매주 합세하고, 작은 고모부와 시동생은 가끔 가서 도왔다.
건축설계사 자격증이 있는 큰 아주버님과 손 기술이 좋은 안산 아주버님이 주로 모양이 좋은 사립문이나 붙박이장, 신장을 만드시고 실력이 꽝인 남편과 시동생은 표시나지 않고 힘든 일만을 할수 밖에 없었다.
이제 3년만에 15평의 사당까지 완성하여서 작년부터 시골 집에서 명절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시댁에 갈 때면 기차를 타고 대전 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이 나오는 시댁으로 바로 가서
나는 충청도 사람 하면 모두 시댁식구들 같이 조용하고, 남을 배려하고, 편안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
친정 어머니가 갑자기 교통 사고로 돌아 가시고 일년 반 있다가 남편과 결혼을 했다.
결혼을 결정하고 처음 찾아 뵌 시댁은 참 어렵고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방문하는 친척에게 모두 큰절을 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색다른 어른공경의 자세의 실습이 참 좋았다.
결혼을 하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돌아 가신 할아버님이나 할머님, 시아버님, 시고모님들, 시누이, 두 분이 내 앞에서 화를 내시는 것 을 본적이 없다.
결혼전 4년간 교편 생활을 한 나는 봉급의 대부분을 어머니께 드려서 사업에 실패후에 다시 집을 산 친정에 도움이 되었다.
엄마가 없는 동생들을 두고 결혼을 하면서 그냥 빈 몸만으로 갔다.
격식도 없고 , 예물도 형편없이 얼떨결에 시집을 온 셋째 며느리에 대해서 시댁 식구 누구도 싫은 내색을 하는 분은 없었다.
오히려 하염없는 사랑으로 말없이 싸않아 주신 시댁 어른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첫번째: 99세여름에 돌아 가신 할아버지와 93세로 할아버지 보다 한 8~9년 먼저 가신 할머님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해 마다 농사 지은 쌀을 몇 가마를 보내 주셨다.
부산에 살고 있는 내가 너무 감사해서 "미역'과 "멸치"등을 우편으로 보내 드렸다.
시댁에 생신이 있어서 갔더니 할아버님이 심각하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를 도와 주려고 쌀을 보냈는데 미역이나 멸치를 보내면 내가 도와 준게 아니니 다음부터 보내지 말아라"
도저히 거역 할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그해 가을 할아버님과 할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집을 방문해서 하루밤 주무시고 가셨다.
교통비를 조금 드렸는데 "고맙다'하고 받으시고 가셨다.
다음날 청소를 하면서 아들의 백일 사진 뒤에 그 돈을 그대로 두고 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두번째: 시아버님은 늘 내게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돌아 가신 친정아버지 보다 더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다.
인생과 병마에 실패하고 돌아 가신 친정아버지의 빈소는 세상의 어느 장례식보다 초라했다.
신장암으로 오래 편찮으시고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출상이 추석 전날이라서 더욱 문상객이 없었다.
18년전엔 큰 돈인 50만원을 부주로 내시고 친정이 초라한 빈소를 보시고, 셋째며느리를 당신의 딸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실제 일찍 세상을 떠난 시누이 중에서 나와 이름이 같은 분이 있다.
당신은 어떤 수술을 하셔도 대전에 가족이 많으니 부산 애한테까지 알 릴 필요 없다고 하셔서 늘 아버님이 퇴원 후에 입원 사실을 알곤 했던 부족한 며느리인 나.
날씨가 굳거나 비가 내리면 큰 수술(폐절제 수술) 을 한 며느리의 건강을 염려해서 전화를 주시는 시아버님.
애들 애비가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 당하고 , 자기 자신에게도 속고 해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는 며느리에게 미안하다며 당신의 걱정을 자주 전화 주시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셨다.
당신의 딸들인 고모들이 가끔 샘을 낼 정도로 나는 늘 아버님의 사랑을 받곤 했다.
세번째: 시 고모님들 다섯분:
큰고모님은 병으로 인해서 시력을 거의 다 잃으시고 시골 본가 근처에 사셔서 자주 뵙지는 못한다.
서울에 사시는 서울 고모님은 남편이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때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게 해주셨다.
둘째 아주버님, 큰시누이님도 결혼전에 서울 고모님 댁에서 살았다.
큰 애를 난산으로 3일간 진통 끝에 초죽음이 되어서 겨우 낳았을 때 나의 곁에는 돌아 가신 친정어머니대신 서울고모와 큰 시누님이 계셨다.
그때 큰 시누이님도 둘째를 임신중이었는데 나의 난산을보고 충격을 받아서 딸아이를 한달 조산을 했었다.
홍성 시고모님은 시골에 갈때마다 김치, 고추장아찌, 깻잎등 밑반찬을 주신다.
막내 시고모님은 66세로 큰아주버님 보다 한 살 많으셔서 시골 마을 어귀에 있는 "수덕 초등학교" 동창이다.
막내 고모님은 작년 추석에 새로 본 며느리와 막내 아들 앞에서 나를 참 부끄럽게 하셨다.
"나는 자네를 박사로 생각하네".....
"어머! 고모님! 제가 무슨... 부끄럽게 그런 말씀을하셔요."
내가 블러그에서 글을 써서 홍성고모님 칠순에 선물로 드리고, 방송국 "오디션'에 어쩌다 합격하여서 공중파 방송에 7분간 나온 것을 보시고 연세 많으신 고모님들은 대단한 일로 여기시는 것 같다.
그리고 일찍 "갑상선 암"으로 돌아 가신 대전 시댁 근처에 사셨던 아파트 고모님....말없이 늘 미소를 지으시며 시댁의 귿은 일을 다 해주시던 제일 어렵게 사셨으나 이제 당신의 자식들은 모두 잘 살고 있는 아파트 고모가 마음의 아픔으로 남았다.
네번째: 큰 시누이님과 막내 시누이:
큰시누이님은 결혼 초부터 나를 좋아해 주시고 가끔은 자랑스럽게도 생각해 주시는 네 살위의 고마운 분이시다.
남편의 바로 두 살위의 누나로 친어머니가 10살 때 돌아 가셨는데 위로 오빠 둘, 아래로 남동생 둘...막내 시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고등학교때부터 밥을 해 먹으며 학교에 다녔고, 새어머니가 오셔서 동생을 낳으면 산후 조리까지 도 도왔던, 평생을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누이는 아직도 회사에 다닌다.
내거 서울서 안양으로 왕복 6번을 차를 바꿔타고 3시간의 통근을 할 때 형님은 자주 오셔서 다락에 모아 둔 빨래를 찾아서 다 빨아 주시고 가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너무 고생을 하네. 나야 일을 타고 난 사람이니까"
그때 남편은 대학원을 다니며 일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김장도 담가 주고 가고, 아기 보는 아주머니가 갑자기 못오게 되면 택시를 타고 와서 퇴근까지 봐주고 갔다.
막내 시누이는 내가 결혼을 했을때 중 2였던 나와 띠동갑인 현재 중학교 미술 교사이다.
까만 교복을 입고 단발머리를 했던 어린 여학생이 이젠 형제들에게 정을 베푸는 촉매제 역할을 하며 집안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늘 따뜻한 말로 "언니" 부르며 어렵던 시절 말없이 아무도 몰래, 아이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용돈으로 주었다.
막내 시동생과 막내 시누이는 거의 50년 전에 오신 새어머니께서 낳은 동생들이다.
박씨의 착하고 넓은 마음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집안의 분위기 대로 말없이 착하다.
다섯 번 째:큰 형님과 둘째 형님...그리고 손 아래 동서들...
큰 동서는 아버님의 고3때 제자였다.
담임을 하셨을 때 "저 아이 같은 애가 며느리였으면 좋겠다'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해마다 년말이면 편지를 보내던 형님을 맏며느리로 맞게 되셨다.
맏며느리 답게 늘 애를 쓰시고 ,맏며느리에 대한 시댁의 예우도 대단하다.
우리 나라의 전통대로 시골땅의 많은 부분과 집과 함께 부모님(시부모님)을 모시라는 할아버님의 생각이라고 어느 날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한번에 많게는 40명이 넘게 모이는 대가족의 음식과 쉴 자리를 늘 마련하신다.
* 음식 솜씨가 없는 내게 큰 형님은 10년간 고추장, 된장을 담아 주었다.
지금은 며느리에게 그리 해 주고 있다.
*둘째 형님은 수덕사 여주지가 중매를 했다.
수덕골 박교장댁의 둘째 아드님이 재학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햇다고 온 더산면에 알려졌었다.
수덕사 신도였던 형님의 어머니이 적극적으로 원하셔서 군입대도 안한 아주버님과 결혼을 했다.
큰형님과, 둘째형님은 모두 시골 본가에서 1년에서 3개월씩 남편도 없는 시집 살이를 했다.
두 분다 대전과, 군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둘째형님은 시집식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임에 빠진 적은 없었다......당신의 역할은 늘 하고 있었다.
우리 시댁이라고 다른집에 있는 갈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갈등을 크게 표현하지 않는 지헤들을 가지고 잇다.
나는 상대방에게 서운한 점이 생기면 섭섭한 마음을 잠시 뒤로 미루고 ....상대방 입장이 되어 본다.
답은 늘 같다....그 사람 만큼 나는 할 수 없다.
그 후엔 어떤 일에도 토를 달지 않고 큰 형님이나 시누이나 모두에게 복종한다.
시댁에서 하는 일은 늘 음식, 대화, 자식 자랑,,,,,,,,모두 되도록 나서지 않으려고 최선으로 노력한다.
잘난 척한다는 오해를 종종 받는 나로서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내가 아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친절하게 말해주어도 가끔 오해를 받는다.
내가 유일하게 듣기에 열중하는 장소가 시댁이다.
마지막으로 시어머니와 남편:
시어머니는 나를 중매를 선 분이다, 아니 시어머니의 사촌 언니가 내가 하숙하던 집의 아주머니와 고교 동창이었다.
어머니는 큰 동서와 10살 차이이다.
"너는 며느리 같구나. 젊은 나이에 할머니 소리를 들으니참 어색하더니...'하셨다.
공주 사범을 나온 그 시대엔 많이 배운 인테리 여성이 아이가 5이나 있고 12살이아 많은 분과 결혼을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어머니는 편생을 퇴행성 관절염을 앓으시고 작년엔 양무릎에 인조 관절을 넣는 수술을 하셨다.
아프셨던 어머니로 인해 시누이나 남편의 형제들은 누구도 먼저 상을 들고 ,치우고 하는 충청도 양반집과는 다른 샐프서비스를 스스로 익혔다.
그래서 나같이 음식 솜씨도 별로 없고, 집안도 잘 치우지 못하고 , 말만 잘하는 (쓸데 없이 남의 뒷담화는 잘 안합니다) 여자도 남편같이 조용하고 배려있으며 아내를 말없이 도와주는 남자와 천생연분으로 만나는 것이다.
"집안이 너무 깨끗하면 불안해. 좀 어수선해야 편하지...'천생연분 나의 남편의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편:
한때는 웬수같았고 이혼도 한번 쯤 고려했던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믿음이 가는 남편이 고맙다.
그를 만났기에 내 인생에 최고의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늘 고단한 그가 건강하게 오래 곁에서 나를 지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에 고난이나 고통이 오면 가만히 견뎌야 한다는 지혜를 가르쳐 준 큰시누이님, 진정한 리더쉽은 보이지않는 배려임을 알려주신 시아버님, 가족의 잔잔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려준 시고모님들, 늘 외로우셔서 이미 치매가 조금 와 버린 고독한 시어머님, 차가운 지성과 이성으로 어렵게 느껴지지만 남편이 찾아가면 회사 일이나 개인 일이나 법적인 조언을 자상하게 해주시는 둘째 아주버님,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좋아지는 막내 시누이......늘 좀더 잘되었으면 생각하게 하는 막내 시동생......
이제 30년 결혼 생활을 돌아 보면 그 모든 어려움과 역경도 축복의 하나였음을 느낄수 있는 것은 밀양박씨 규정공파 27대손인 아버님이 대장이셨기에 모두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시댁 어른 들께 감사의 인사를 다시금 고개숙여서 드립니다.
셋째며느리 호용,지용에미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