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끝없는 도전 정신의 원천은 마음 깊이 숨어있는 무거운 우울증
나의 본성은 밝고 맑으며 긍정적이고 따뜻함을 부모에게 물려 받았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경기도 파주의 한 시골 마을 에서 자랐다.
나는 시골 아이들의 전형적인 몽실 언니 머리에 외모에는 관심조차 없는 선머슴 애 같았었다.
천진난만이 지나쳐서 공부는 하지 않고 놀이에만 몰두하여서 무슨 놀이든 잘 하였다.
공기놀이, 줄넘기, 땅 따먹기, 심지어 남자 아이들과 제기차기, 말타기도 하였다.
학교가 끝나면 들로 냇가로 마구다니며 아카시아꽃잎도 따먹고 메뚜기도 구워 먹고 놀았다.
숙제는 늘 안해가고 말썽쟁이인 나를 선생님은 맨 앞 줄에 말썽쟁이 남학생과 앉혔다.
시골에 살았지만 농사를 짓지 않았고 부모님은 제재소와 음식점을 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좀 먼 거리여서 버스로 통학을 했는데 종종 차비로 사탕을 사먹고 걸어서 집에 오곤 하였다.
우리 동네에 새 학교가 생기자 선생님은 엄마를 부르셔서 제발 전학을 가라고 말씀을 할 정도로 철이 없는 아이였다.
물론 2월이 생일이라서 7살에 학교에 가야했지만 부모님은 나를 6살에 학교를 보내서 (그당시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졌고 놀이에만 정신이 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집에 여유가 있는 편이라서 교육열이 높았던 엄마는 서울에 작은 집을 샀고 외할머니와 함께 우리를 유학시켰다. 고려대학교 법대생을 과외선생님으로 정해 주기도 하였다.
성적 지진아인 나를 다시 5학년으로 전학을 시키고 과외선생님까지 붙여주었으니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나왔다.
서울로 전학을 하고 반에서 1등을 했고 ,나는 서울 아이들 틈에서 몽실언니 머리에 교복을 입은 나의 모습이 촌스럽다는 것을 처음 느끼고 부끄러웠다.
엄마는 성적을 계속 유지하는 나에게 성취감을 느꼈는지 좋은 옷과 가방, 머리 모양.....서울아이가 되어갔다.
고등학교 졸업 하기까지 내게온 큰 변화는 부모님이 시골장사를 정리하고 서울로 오셨으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고3초에 '장티프스"라는 큰 병을 앓아서 입시 준비를 제대로 하지못한 것이다.
모의고사 점수대로 여대에 진학을 겨우 했고 엄마에게는 학과가 나의 적성과는 다르다는 것은 관심에 없고 명문 여대에 진학한 것만이 대단한 기쁨이었다.
대학 4년동안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학점은 별로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학 4학년 10월에 "결핵성 늑막염"으로 대학 병원에 한달을 입원을 하였고 졸업후 3년간을 결핵약을 먹어야했다.
1년간을 집에서 누워 있기만 해야 했던 나는 그 육체적인 아픔과 많은 시간의 공백이 괴로워 도피책이 필요했다.
'여성 동아"에 장편 소설을 응모하기위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냥 나의 이야기였다.
6개월을 누워있다가 신문에 난 한줄의 광고-수학,과학 교사구함,경기도- 를 보고 찿아간 경기도의 한 읍의 학교.
남녀 중고등 학교가 한 울타리에 있는 생각 보다 큰 학교여서 놀랐다.
면접후 취직이 되어서 2학기부터 하숙을 하며 수학교사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교장 선생님은 나의 성실성을 좋아 하셨고 3년후 같은 교정에 있는 여고 교장으로 전임하시며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사이 엄마가 45세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내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9월의 하늘이 너무 프르고 맑아서 더 슬펐다.
7번을 기절을 하면서 교회 식구들과 엄마의 장례식을 교회장으로 치루었다.
아버지는 백내장 수술을 받아서 한 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한달후에 수술이 잡힌 다른 눈도 실명 할 수 있다는 통고를 받은 상태였다.
하숙을 하며 나는 집에서 써둔 원고를 정리해서 "여성동아"장편소설에 응모하였다.
본선8편에는 올랐으나 당선작은 화학을 전공한 대학 1년 선배가 되었다.
다음해 하숙집 아줌마의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우연인지 교장선생님과 남편의 상사와 중학교 동창이어서 우리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교장선생님이 먼저 아시고......서로 자기 직원이 아깝다고 하시는 사이에 결혼은 성사 되어갔다.
엄마가 돌아 가시고 생활력이 무능하시고 마음만 착했던 아버지는 맏딸인 나에게 여자 문제로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주었다.
아버지로 부터의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을 하였다.
결혼후에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산에 왔고 나는 둘째를 임신하여서 힘든 상태였다.
대학에서 조교수로 있던 남편이 유학을 가려고 모교에서 추천하여 학비와 생활비, 비행기표까지 나왔으나 나는 복직이 되지 않았고 몸은 이상할 정도로 아팠고 체중이 줄었다.
대학 병원의 정밀 검사결과 "기관지 확장증"이여서 오른쪽 폐 절제 수술을 받았다.
남편은 유학을 포기했고 학내 사태가 있었을 때 학생편에 섰기에 그리고 박사학위도 없었고
재임용에서 탈락하였다.
내가 몸이 아파서 남편에게 큰 빚을 진 것이었다.
그때 남편은 야간 강의도 하였는데 남편과 나이가 같은 여자가 늦깍기 학생으로 입학을 하였다.
학내사태때 그녀는 남편의 친구같이 도왔고 그들은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그여자로 인해서 수년동안 고통이 따랐고 함께 사업을 한다고 다녔고 그녀의 남편은 해양대학을 나온 선장 출신이라서 세상 물정 모르기는 남편과 같았다.
하는 것 마다 실패를 하는 동안 남편과 다툰 이유는 내가 그 일을 반대를 했기때문이었다.
그여자는 하는 것마다 찬성을 하고 사업 자금도 조달을 하였다.
점점 밖의 일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12년간을 "책 대여점"을 하면서 아이들을 교육시켰고 가슴은 놀란 새 마냥 늘 두근 두근 하며 살았다.
그 10여년이 나에게 심각한 화병을 가지게 하였고 "울화증"은 원인이 없어져야 하는데 남편의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설상 가상으로 사기까지 당하고 나니 울화증이 우울증으로 바뀌었다.
물론 나는 "자기 최면"의 도사가 되었다.
그 갑갑함이 견딜수 없어서 책방을 찾은 아이들의 순진하고 솔직한 대화에 익숙해졌고 혼자 있을 때는 깊은 우울에 빠져 들었다.
두 아들아이들은 부모의 좋은 점만을 이어 받은 것 같다.
착하고 성실하며 독하게 공부를 하였다.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아파트 뒷산을 오르며 신에게 대화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나님! 보시기에 제가 더 이상 어떻게 열심히 살 수가 있습니까?"
땅을 내려다보며 흙 냄새도 맡고 , 눈물이 나면 울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른 미소로 바꾸고,
등산로는 나와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소가 되었다.
점차적으로 마음은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
"하나님! 아이들이 더 이상 성실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아들들을 돌봐 주십시요. 그 아이들이 인생을 부정적으로 볼까 두렵습니다."
두 아들은 바르게 컸고 큰애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였고 작은 애는 대형마트에 취직하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향해서 노력중이다.
남편은 계속되는 실패로 상처입고 주변의 사람도 다 떠나갔고, 이제 적성에 맞는 직장에 취업을 하였다.
그 동안 가족에게 준 상처에 보답을 하려는 듯 가족에게 지극 정성을 다 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적인 충격과 상처를 받아서 인지 나의 마음은 평온을 찾는데 시간이 필요하였다.
정신과에서는 상처 받은 만큼의 시간이 치유되는 데 필요하다고 했다.
불안하고 가슴 두근 거리는 불안을 누르기위해서는 무엇인가 몰두를 해야했다.
돈이 안들고 내게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에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내가 도전한 것은
"신동아 논픽션"응모: 12년간의 책대여점 경영기-탈락
"동서 커피문학상 수필 응모"-탈락
"M B C T V 제2의 김미경을 찾아라"에 응모 14명에 선정되어 2박 3일의 합숙후에 본선 진출
7분간 방송 출연-등수안에 못들었음
"다음 블러그에 글을 써서 -12월 5주 베스트 블러그선정 -다음 캐쉬 10만원 받음.
지금 새로 도전 할 것에 대해서 준비중에 있음.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서 찾기 시작한 정신과 선생님은 최근 2년간의 상담을 통해서
(3달에 한번 인터뷰하고 약은 남편이나 아들들이 받아옴)
"대단한 에너지입니다. 마치 장애물 경기하듯이 힘든 고비를 잘 넘기십니다. 지금 준비하시는 것도 꼭 성공 하실 겁니다"
"선생님! 에너지가 아니라 제가 우울증을 자기최면으로 극복하려고 자꾸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겁니다"하였더니
"그것도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하며 웃으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특이하다고 하였다.
다른 집들은 형편이 어려워지면 서로 원망을 하면서 헐뜯는게 보통인데 우리 가족은 똘똘 뭉쳐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였다.
힘든 상황이면 남편을 포기하거나 아이들 교육을 포기하는데 나는 둘다 싸안고 가려니 힘이 든다고 하였다.
나이를 의식할 여유도 없이 살아 왔는데, 아니 살아냈는데 문득 정신 들어 바라보니 나이든 내가 낯설게 보인다.
큰 아들 아이는 제 애비가 결혼한 나이를 넘겼고 막내는 아직도 내눈에는 귀엽게만 보이는데 엄마를 안타깝게 보며 배려하는 청년으로 훌쩍 자라 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이 대견하다기 보다는 자식에게 늘 미안한 에미이다.
"엄마는 왜 맨날 미안하다고 그래. 부모 자식간에 빚이 어디 있다구. 내가 이다음에 더 잘해 줄께. 지금은 능력이 없네."
500 피스와 150피스의 퍼즐을 맞추어서 만든 액자를 선물로 주며 막내가 싱긋 웃으며 정겹게 말했다.
나의 소박한 소원은 그 동안 너무 많이 놀래서 그런 일을 또 겪지 않고 평온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 가장 힘든 소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