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없었던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남편이 10살때 오신 새어머니이다.
올해 남편이 58세니까 48년을 "엄마"라고 했다. 남편은 지금도 가끔 엄마라고 부르고 60세가 된 시누이님은 아직도 엄마라고 부른다.
낳아주신 엄마는 8년을 살고 돌아가셨으니 친엄마와 다름이 없다.
어머니가 25세되 던 해에 37세의 다섯명(4남 1녀) 자녀가 있는 고등학교 교사의 재취로 오셨다.
그때 큰 아주버님의 나이는 17세....새엄마와의 나이차가 8살이고 큰 형님과는 10살 차이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주버님은 아래로 줄줄이 네명의 동생을 바라보며 밤에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아주버님과 남편은 7살 차이인데 겨울에 학교에 갈때면 남편이 손이 시려울 까봐 학교 앞까지 가방을 들어다 주고 갔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이 장갑도 없이 학교에 가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남편은 초등학교 3학년에서 5학년까지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다 수덕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고향 예산군 덕산 시골 마을 에는 대대로 농사를 지어 오신 집에 시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공립학교의 잦은 전근으로 큰 아주버님과 둘째 아주버님은 도시에 사는 부모님과 살고 남편은 어린 동생과 시골집에서 할아버지와 살았다.
동네 입구의 벽지 학교 "수덕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지금은 미국에 이민가서 30년동안 자리를 확실히 잡고 살고 있는 시동생을 늘 함께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시동생은 5살이었는데 늘 남편의 옆 자리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고 한다.
남편보다 두살 위인 누나는 상황에 따라서 부모님과살기도 하고 시골집에 살기도 하고....
부유한 집의 고명딸이었으면 사랑을 듬북 받았을텐데...엄마가 일찍 돌아 가셔서 위로 오빠 둘 아래로 남동생 둘...사이에 끼어서 자라면서 엄청 고생을 하였다.
남편의 형제들은 모두 함께 살면서 아기 자기 하게 살아 본 적이 없다.
형제란 서로 살을 부딪치며 싸우기도 하고 서로 아끼기도 하며 살아야 끈끈한 정이 쌓이는데
전형적인 충청도 집안의 엄한 질서와 복종만을 배운 형제들은 마음은 한 없이 착하고 넓은데 형제간의 사랑의 표현을 할 줄을 모른다.
누가 사업에 실패 하여도 마음만 안타까울 뿐 구체적인 도움의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것은 우리 남편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제 연로하신 아버님만이 못사는 , 사업에 실패한 자식들이 안스러워서, 안타까워서.....
마음의 긴장을 풀지 못하시고 늘 걱정을 안고 사시는 모습이 마음이 아플 뿐이다.
예전엔 교사의 봉급이 적었으므로 시할아버지께서 손주들의 학비며 식량들을 모두 해결해 주었다.
할아버지 덕분에 아버님은 교직을 천직으로 아시고 평생을 존경받는 교사로 살아 오셨다.
남편의 형제들은 모두 수재인 편이고 형제중에서 대학교 재학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분도 계셔서
아버님은 교사로서 당당하게 제자를 가르치셨고 나라에서 교육 문화 훈장도 두 번이나 받으셨다.
큰 동서는 아버님이 고3때 담임을 했던 제자였다.
여학교 교사는 제자들과 연계가 되기 어려운 편인데 아버님은 큰 형님 친구분들에게 해 마다 스승의 날이면 식사 대접을 받으신다.
둘째 형님은 시댁 근처의 유명한 사찰의 주지 스님이 중매로 결혼을 했다.
외라리 마을의 박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 사법 고시에 합격 하였다는 소문을 절에 자주 다니던 둘째 동서의 어머니가 듣고서 혼인 까지 연결하셨다.
나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시어머니의 사촌 언니와 여고 동창이었는데 중매는 그렇게 시작했는데 ...내가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남편 직장의 상사가 동창이라서 서로 부하 직원을 칭찬을 하다가 결혼이 되었다.
어머니의 첫인상은 참 인자하고 고운 모습이었다.
옥색 한복을 입고 시누님과 함께 오셨는데...광화문의 맞선 많이 보는 호텔 커피숍에서의 첫 만남이었다.
나를 참 좋게 보셨다.
나는 맑고 착하게 생겼다는 인물평을 받았고, 또 나와 시어머니는 17살 차이인데 어머니는
"이제야 네가 며느리 같구나...둘째 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혼사를 치루었는데..."하시며 웃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27세 큰 며느리를 보셨던 어머니.
나 같으면 도저히 결혼 조차 엄두도 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당시로는 드물게 유명 사범학교까지 나오시고 초등학교 교사까지 지내신 분인데 어떻게 자식이 다섯이나 있는 분과 결혼을 결심 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도 무척 외롭게 자라신 분이다.
집은 부유했으나 어머니 없이 할머니 밑에서 크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님과 결혼후에 쌍둥이 따님을 포함하여 1남3녀를 낳으셨는데 쌍둥이는 모두 어려서 병으로 죽었다.
그 중에 한 분이 나와 이름이 같다고 한다.
어머니는 결혼후 곧 류마티스성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여서 지금까지 편찮으신데 몸이 불편하니 남에 대한 배려가 적을 수 밖에 없다.
생활이 넉넉하지 않으니 집안의 모든일을 대부분 아버님이 해결하였고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제 73세의 시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여 ...골다공증으로 키가 10cm나 줄었고 몸무게도 40kg조금 더 나간다.
그리고 머리속에 지우개가 생겨서 먼 기억을 자꾸 말씀하시고 가까운 기억은 빨리 잊으신다.
고달팠던 삶의 여정이 무거워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남편이 말한 적이 있었다.
새어머니와 살았던 친어머니와 살았던 좋은 기억도 있고 가슴 아픈 기억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는 몸이 많이 불편하신 노인이시다.
몇 달전 어머니와 T V를 보고 있는데 혼자말 처럼 하신 말씀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
"나도 참 철도 없었지. 어떻게 자식이 다섯이나 있는 사람에게 시집을 올 생각을 했나 몰러"
"그럼 . 어머니! 정말 철이 없었지요. 나 같으면 못해요,"
"그래도 내가 평생을 아파서 아버지한테 미안해. 그리고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으신게 고마워. 아이들도 다 착했고"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곳이 시댁이다.
나는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 보지만 어머니 만큼 할 수 없다.
더구나 우리는 사업 실패로 부모님에게 걱정을 많이 드렸다.
이제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건강하여 부모님에게 걱정을 드리지 않고 막내까지 무사히 졸업하고 취업하여 기쁨을 드리고,
시간이 나는대로 한 번이라도 더 부모님을 찾아 뵙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큰 소원은 두 분다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못사는 세자식이 심이 펴서 잘 사는 모습을 보셨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우리집, 손위 시누이님, 막내 시동생......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효도 할 시간을 많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