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아! 큰 며느리! 내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모과 2006. 7. 12. 19:34
LONG
세상의 큰며느리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그대들의 희생이 있기에 각 가정이 평화롭습니다.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큰 형님!
형님을 만난 건 제가 복이 많기 때문입니다.
ARTICLE

7월 7일이 시할아버님의 제사라서 대전에 갔다.

10일 부터 시작 할 일이 있어 준비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오후 5시에야 시댁에 도착했다.

 

어머님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큰 형님 댁으로 가니 6시가 다 되어 갔다.

큰 형님 혼자서 전을 부치고 있었다.

"둘째 형님은 요?"

"아까 왔다가 오늘 정원사가 와서 정원 일을 해야 한다며 갔어"

하는 데 얼굴 색이 노랗고 헬슥해 보였다.

 

"형님! 어디 편찮으셔요? 얼굴색이 왜 그러셔요?"

"아녀,괜찮아. 이제 다 했어 저녁상만 차리면 돼. 제사 준비는 다 했어."

"아니 형님 손등이 왜 그래요?"

손등에 큰 상처가 나서 부어있었다.

"열흘 전 쯤에 일을 하다가 실수로 칼을 떨어 트려서 손등에 찍혔어."

"아니, 왜 꿔매지 않으셨어요?"

"신경을 건드렸나봐. 3주일간 두고 보자고 의사가 그러데.'

가만히 있으면 아프지 않은데 무심코 싱크대나 냉장고 모서리에 부딪치면 눈물이 날 정도로 진저리치게 아프다고 했다.

 

잠시 후 작은 집의 큰 며느리인 동서가 이사 갈 때 집들이 용으로 쓰는  휴지 한 봉지를 가지고 왔다.

 동서는 무의촌의 보건소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사택에 살고 있다.

대전시내에서 30분이면 가는 가까운 동네였다.

남편인 서방님은 대전 시내에서 사업을 하여서 여유가 있는 집이다.

 

작은 집 동서는 형님이 부쳐 놓은 전을 몇 조각을 먹고 금방 배달 된 따끈 따끈 한 시루떡을 전과함께 형님이 싸 주니까 곧 돌아갔다.

제사 드릴 음식은 먼저 덜어 놓고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형님 제가 할께요. 무엇이든지 시키세요."

내가 말하니 아픈 손으로 우뭇가사리를 채를 썰더니 야채와 함께 새콤 달 콤 하게 무치기 시작했다.

부엌 도구를 사용하고 설걷이 하는 싱크대에 던지면 나는 얼른 씻어서 놓았다.

 

막내 동서가 퇴근하여 조카들과 함께 왔다.

막내 동서는 나보다13살 아래이다.

우리 둘이서 조수처럼 열심히 형님이 내놓는 음식을 접시에 나누어 놓고 식탁을 차렸다.

 

잠시후에 얼마 전에 칠순 잔치를 한 가르개고모님 내외분과 막내 고모님 내외분,작은 아버님과 작은 집 큰 서방님이 왔고 시누이집 네식구,우리 부모님과 우리 부부,..큰 형님 내외분이 모여서 식사를 했다.

큰 아주버님이 홍성시장에서 사온 모시 조개국과 형님이 손수 만든 도토리 묵무침,조기구이 각종 나물 ,밑반찬들을 해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에 막내 시누이 가족이 가는 데 형님은 조갯국과 전, 떡, 각종 나물을 싸서 보냈다.

 

식사 후 제사 준비에 들어 갔다.

미역국도 끓이고, 다시 조기찜도 하고 과일,산적....

냉장고 쪽으로 가시던 형님이 "아!" 하더니 그대로 주져 앉는다.

"형님! 왜 그러셔요? 네?" 걱정이되어서 물었다.

돌아서는 형님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형님은 냉장고 모서리에 다친 손을 부딪쳤다고 손등을 보여주었다.

손등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큰아주버님과 남자분 들이 제사 상에 음식을 놓기 시작하였다.

 

큰 아주버님이 "곶감은?"하자 형님이 크게 눈을 뜨며

"내가 곶감 갔고 있슈?' 하더니 화를 삭히는 표정으로

"냉장고 안에 찾아 봐유"하였다.

 

조금 있다가 아주버님이 다시 부엌으로 와서

"술은?"하니

"내가 술을 가지고 있슈? 방에 찾아 봐유 .백세주나 과일주 있나."하였다.

 

나는 미안해서 도와 드리고 싶어도 제사를 몇 번 지내지 않아서 도와드릴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주로 남편만 시댁에 보냈고 친정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제사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몸도 편찮으시고 교회 권사님이라서 식사만 하시고 집으로 가셨다.

형님도 교회 집사님이신데 시댁이 유교니까 정성껏 음식을 장만 한다.

우리 시댁에서는 여자들에게는 절을 시키지 않는다.

지방마다 제사 문화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막내도 식사후에 아이들을 재우고 온다고 갔다가 12시에 다시 온다고 하며 형님이 싸주는 음식을 가지고 갔다.

형님과 둘이서 음식을 장만하는 데 형님이 갑자기 큰소리로

"아이구!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노릇을 어떡해. OO에미가 이렇게 하겠냐구?"

"형님! 나중에는 제사 음식을 맞추면 되요. OO에미가 형님처럼 어떻게 해요."

OO에미는 큰 조카 며느리이다.

" 일년에 제사가 몇 번이야 ,도대체. 제사만 있나? 명절있지. 생신있지...."

"형님! 형님! 쉿! 공연히 수고는 수고 대로 하시고 ..그러면 노력한 보람이 없잖아요.'

내가 미안한 마음으로  계속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는지 그만 말을 했다.

제사때 한 번도 피곤 한 기색도 없었던 형님이 다친 손 때문에 그만 짜증이 나셨나보다.

나 같으면 그 정도로 아프면 제사를 지낼 수 있었을까? 못 할 것 같다.

 

12시가 다 되서 둘째 아주버님 혼자 왔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분인데  그 가족들은 친척들과 융화가 잘 안되었다.

명품만을 사용하는 둘째형님은  가족 모임에 인색한 편이다.

그분 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모두 60이 넘거나, 60을 향해 있으면서 가끔씩은 그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지곤 한다.

 

큰 형님은 아버님의 제자이다.

고3때 담임을 하신 인연이 시부모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내가 결혼을 하니 남편이 내게 말했다.

"더도 덜도 말고 큰 형수님 만큼만 하면 된다."

나는 맨발을 벗고 달려도 큰형님만큼 못한다.

 

나의 장점중에 하나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인정하면 복종한다는 것이다.

형님이 하는 일에 토를 안 달고 못 하는 일이 라도 열심히 한다 진심으로.

 

제사날에는 왜 그리 말씀들이 많을까?

"음식이 짜다."

"도토리 묵이 단단해서 젓가락이 안들어 간다."

"음식이 너무 많다,적당히 하지"

 

사람이 얼마나 올지 알고 음식을 적게하나?

좀 짜거나 싱거우면 어떠하랴?

수고 한 사람의 정성을 치하하면서 하루 쯤 음식을 하는 사람의 식성대로 먹어주면 안되나?

 

"형님! 제가 음식에 대해서 일체 토를 안 다는 것을 아셔요?"

"알지."

형님은 일하는 중간 중간 찬 식혜도 한잔 주고, 참외도 깍아서 입에 넣어 주고 하였다.

 

결혼하고 10년간을 고추장 된장을 담가주셨던 형님!

시할아버지께서 99세까지 장수하셔서 심한 시집살이는 아니지만 평생을 시집식구 뒷치닥 거리에 애 쓰시는 형님!

올해 62세, 형님도 보호 받아야 할 노인인데 누구에게나 베풀기만 하니 몸이 성할 리가 없다.

설걷이가 대충 마무리 될때 남편이 부엌으로 와서'말했다.

"여보! 아버지가 그만 가자시는 데"

나는 거실로 나가서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아버님 10분 후에 가시면 안 될까요? 형님이 손이 많이 아픈데요"

아버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다시 자리에 앉으셨다.

 

다음 날 아침 큰집에 모두 모여서 어제 제사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예산 본가로 아버님과 남편,큰 아주버님이 집을 고치러 가셨다.

거의 매주 가는 데 음식은 큰 형님이 마련한다.

아버님께서  올 겨울에는 그 곳에서 겨울을 지내시겠다고  매주 가셔서 비워 두었던 집을 새로 짓다시피 고치고 있다.

 

"OO에미야! 너도 갈래?"아버님 말씀에 나는 얼른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집에서 마당에 풀이나 뽑을래요."하니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웃으셨다.

시집 온지 30년이 되어서 셋째 며느리의 솔직한 성격을 아셔서 웃고 마신다.

 

저녁 때에 형님은 막내 시누이 가족과 어머니와 나를 초대하여 비빔밥을 해주었다.

집에 가보니 어느새 집을 윤이 나게 치워 놓고 행주까지 삶고 있었다.

 

아이고,기가 막혀!

나는 죽어도 못해요.

식사후에 쇼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형님!

 

아! 내가 맏며느리가 아니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큰 형님이 맏며느리여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