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있음에 올해 겨울은 따뜻하겠노라!
지난 토요일 , 서울에 갔다가 서대전 역에 도착한 나를 태우러 남편이 마중을 왔다. 덕산 시골집에 함께 가기 위해서였다.
시골로 가는 길에는 도시에서만 자란 사람들은 전혀 모를 들판에 하얀 덩어리들이 들판에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나는 작년에 호남 지방을 가족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처음 본 저 물건의 사용 용도를 알았다.
함께 여행 중이었던 친척의 설명으로 가축사료를 저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계로 볏 짚을 돌돌 말아서 저 속에 저장한 것이다.
덕산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추수가 끝난 논의 모습이다. 한 때는 마을의 전체의 논과 밭이 거의 다 시집의 소유였었다. 작은 집 소유의 땅을 모두 팔아서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골 집 앞의 겨울보리가 초록색 잎을 많이 들어냈다. 올해 눈이 많이 오면 잘자라고 눈이 오지 않고 날씨가 추우면 그대로 얼어 죽는다고 남편이 설명을 해주었다.
가을하늘은 드높고 푸르렀다. 구름은 하얀게 너무 당연한 것인데 , 참 신선하게 마음 속으로 다가왔다. 시골에 가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된다.
3년 전 광주의 조선대 장미원에서 사다 심은 줄 장미는 때도 모르고 꽃을 피우고 있다. 여름엔 돌담이 너무 뜨거워서 장미꽃이 피어나보지도 못하고 시들었다. 남편이 철사 줄로 선을 만들어 주고나서 꽃들이 제대로 피어났다.
막내 고모부님이 텃밭에서 굴러다니는 호박을 모아다 놓으니 모양이 다 달랐다. 다음날 대전의 막내 고모님의 친구 집에 배달해드렸다. 친구 분들과 모여서 호박죽을 해서 나누어 먹는다고 했다.
한가로운 시골집 마당, 이번 주에는 막내 고모님 내외 분과 우리 부부만 들어갔다.
올해는 쪽파를 너무 늦게 심어서 자라지를 못하고 성장을 멈추었다. 쪽파의 모습은 뭐든지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알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남편과 고모부는 토요일 밤에 도착해서 큰 고무통에 수북하게 은행 알을 주워서 담아두었다.
마당 끝에 있는 지하수도 꼭지에 호수를 연결해서 은행나무있는 곳 까지 가지고 갔다.
고무통에 수북한 은행알과 은행알을 덜어서 발로 밟아서 깔 작은 고무통 과 작은 책상 의자를 미리 준비해두었다.
뒤집어 말려논 고무장갑을 입으로 불어서 바로 하고 있는 고모부와 남편의 모습, 본인들이 먹는것보다 친구들에게 주는 것이 더 많다. 남편은 기관지가 약한 나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남편은 시골집에 있는 작업복을 입었는데 자꾸 흘러내려서 팬티가 다 보일 정도이다. 누구를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은행을 까고 있는가? 고모부는 허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시골집에서 일을 하고 대전 집으로 돌아 가면 이 삼 일은 아프다고 한다.
고무 장화를 신고 열심히 은행 껍질을 까고 있는 남편의 모습, 참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남편이다. 세상 물정을 잘몰라서 고생을 오래한 우리 부부는 이제 노년을 좀 편하게 보내고 있다.
두분이 열심히 고무장화를 신은 발로 은행알을 밟아서 까고 있다. 저 일을 하고 싶어서 시골에 들어온 것이다. 하하하, 재미있기도 하고 약간 기가 막힐 때도 있다.
남편(62세) 과 나(60세)는 시골집에 들어 갈 때 마다 최연소 졸병들이라서 시종일관 순종의 자세로 임한다. 누구와 들어가더라도 그 분의 의향대로 따라서한다.
왼쪽의 박씨 아저씨 표정이 너무 웃긴다. 나이가 들면서 멋져져서 다행이다. 남편의 모습은 바로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누라인 내가 그렇게 편하게 해주는데 세상이 다 평화롭고 좋을 것이다. ^^
남편 스스로 자주 그렇게 말한다 . 나는 자화자찬을 잘하기는 해도 잘가려서 하는 사람이다. 하하.
나는 37살에 오른 쪽 폐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했다. 그후 3년은 체중을 그대로 유지했다. 매일 30분 이상 걷고 목욕탕에 다녀서일 것이다. 3년후부터 해마다 1kg씩 체중이 늘어나서 이제는 건강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겨울이면 감기에 자주 걸려서 남편이 안타까워한다.
그런 나를 위해서 열심히 은행 알을 까고는 있는 남편이 있어서 행복하다.
40대에 사업에 계속 실패를 해서 나를 힘들게 한 남편은 평생 아내에게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 후 남편은 그 약속을 열심히 지키고 있다.
시집의 땅에 마을 사람이 두 동의 비닐 하우스를 짓고 배추와 무 농사를 짓고 있다. 고향 시집의 땅 대부분의 농토는 농업 진흥공사에 임대해주고 있다.
일요일 오후에 서울에 사는 종손 조카 가족들과 대전의 큰 아주버님(69세,67세) 부부가 왔다. 막내 고모님(70세)이 점심 밥과 반찬을 만들었다. 나는 보조이다.
블로거 이웃 '땅끝식객'님이 보내준 해남 파래 김을 구워서 바지락 국과 함께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있다. 홍성 고모님이 보내 준 밑반찬도 맛이 있다.
알이 작은 은행은 은행주를 담군다며 깨끗하게 정리 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 역시 기관지가 약한 나를 위해서 만든다고 했다.
시골집은 집의 울타리 돌담만 전문가가 쌓았다. 나머지는 모두 남편 형제들이 매주 모여서 7년 동안 고친 집이다. 자주 만나야 형제 간의 우애도 생긴다고 아버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고향 집앞 주차장도 작은 돌들을 사서 모두 남편의 형제들이 직접 깔은 것이다. 비가 오면 질척거리지 말라고 만들었다.
봄에는 보리를 심어서 추수하고 , 다시 들깨를 심었고 , 다시 김장배추를 심었다. 다시 보리를 심어서 파랗게 싹이 올라오고 있는 고향 집의 양쪽 밭은 모두 시집의 소유이다.
40대의 나는 늘 남편 때문에 화가 나있었다. 몸과 마음은 병들어 갔고 얼굴 표정에도 그 상처의 흔적이 나타나 있었다. 내가 블로그에 얼굴을 노출시키기 싫어하고 오프라인 모임에 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만나고, 극복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참고 극복하고 나면 잔잔한 평화가 마음 속에 차올라 온다는 것이다.
아들들이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한 후 더욱 더 남편과 사이가 좋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식과 남편,가족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할 필요도 많이 느끼고 있다. 나의 노년의 꿈은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 좋은 시어머니,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온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뛰어넘는다. 나는 가상의 세계를 쓰기 위해서 현실에 소홀하고 싶지가 않다. 그냥 보통 할머니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도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할 것이다 .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남편에게 나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서 그가 내게 주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어졌다. 40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반전이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