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그리고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남편
며칠 전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주 힘들게 끙끙대며 전화를 받았다.
" 여보! 나 잘거야 .전화 하지마"
" 응 .끙끙, 헥헥 " (무척 숨을 힘들게 쉬는 소리)
" 당신 왜 그래 ? 화장실에서 똥 눠?"
" 아! 똥은 뭔 똥? 지금 도서관에서 책을 나르고 있는 중인데"
" 아 ! 힘들어서 그러는구나? 미안 ! 좀 전에 막둥이가 화장실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똥을 눈다고 해서 하하"
우리집 막내는 화장실에서 내 전화를 받으면 꼭 구체적으로 상황 설명을 하곤 한다.
남편이 하는 대형마트 안의 서점이 매출이 좋지 않아서 공개 입찰을 본 시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도서를 납품해서 겨우 현상 유지하고 있다. 환갑의 나이에 매일 땀을 흘리며 무거운 책을 나르며 열심히 나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
두 아들은 집을 떠나 서울에서 같이 살면서 미래를 위해서 저축을 하고 있다.
나와 직원들을 벌어 먹여 살리느라고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 늘 안스럽고 걱정이된다.
* 29세
1. 나의 신혼은 꿈결같이 13년 동안 이어졌다.
나는 27세에 결혼을 해서 13년을 꿈 같은 신혼생활을 보냈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던 기간이다. 조용하고 남을 배려하는 남편 때문에 우리는 싸울 일이 없었다. 사실 나는 이때 부부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나이 44세부터 파란만장한 인생 10여년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36세
40대초 고난이 오기 전까지 나는 심지어 불혹의 나이라는 40이 지났으니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까지 있었다. 참 세상물정 모르는 교만함이었다.
2 40대, 전쟁같은 사랑의 세월10년 그리고 나.
내 인생의 고난은 육체적인 병으로 시작이 됐다. 나는 오른쪽 폐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한 후 빨리 지치는 체질이 됐다. 한 시간을 일하면 한 시간을 쉬어야 하는 저질의 체력이 됐다.
남편은 직장에서 어려운 일을 겪은 후 사직을 하게 된 시기도 이때였다. 그후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고난이 한꺼번에 커다란 파도같이 휩쓸려와서 덮었다.
학창시절을 계속 장학금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잘이어가던 남편에게 고난은 8살에 생모가 병환으로 일찍 돌아 가신 것과 자기가 몸이 아파서 중2 때 휴학을 한 것 뿐이었다.
직장을 갑자기 그만둔 남편의 방황은 내가 받아 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늘 오빠같이 나를 돌봐주고 살았던 남편은 내게만은 구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책대여점을 하던 12년의 기간과도 일치한다. 아침 11시 부터 밤 12시 30분까지 책방에 갇혀서 살아야 했기에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잘 견뎌낼 수도 있었던 기간이다.
때론 온 몸에 쥐가 나는 듯한 고통이 왔다. 그러나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시아버님과 시누이형님 때문이었다. 나의 원망과 화풀이를 다 받아 준 시누이 형님에게 늘 빚을 지고 살고 있다.
3. 상처받은 기간만큼 필요했던 화해의 10년의 세월
가끔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남편은 결혼 후 변함없이 내게 잘하려고 했다. 자기가 방황하던 시절에도 내가 친정 조카를 가르치러 다니던 17개월 동안은 일찍 돌아와서 책방을 봐주었다.
남편자신도 자기를 어쩌지 못하던 방황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이제야 이해가 된다. 중소기업인 출판사(서점도 운영)에 취직이 되고 우리 부부도 서서히 화해의 시기로 돌아섰다.
다른 부모들은 사교육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거의 매일 싸우던 40대 ,두 아들은 어미가 어찌될까 걱정하며 착하게 자라주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모두 남들의 칭찬을 받으며 성장했다. 참 미안하고 고마운 아들들이다.
남편은 그 동안 갑자기 화가 폭발해서 마구 화풀이를 하는 나의 성질을 다 받아 주었다. 아무 말없이 그렇게 해준 남편이 참 고맙다. 남편도 나도 다시 화해를 위해서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세월은 상처받은 세월만큼 필요한 것 같았다. 남편은 나를 이해하고 다 받아주었다.
4. 시집 어른들이 친정 식구보다 좋아진 세월 34년
사실 나는 남편과 죽을 때까지 100% 까지는 화해를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3년 전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오고 시집 어른들을 자주 대하면서 나의 얼었던 마음도 서서히 녹아 내리게 됐다.
시아버님, 시누이형님, 시고모님들이 모두 나를 칭찬하며 좋아해주었다. 김치며 밑반찬을 계속 해주고 있다. 친정부모님도 모두 일찍 돌아가신 나는 맏딸이기도 해서 친정이라고 마땅히 갈 곳이 없다.
두 아들에게 좋은 친가 어른들이 계신게 참 다행이다. 대가족 시집의 어른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우리 아이들이 복이 많다고 생각한다.
대전으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형식적인 관계였던 시집 어른들이 진심으로 좋아졌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월요일이면 진잠 월요장에서 간단한 장을 봐서 시집으로 간다 자주 만나고 경조사에도 함께 하니 점점 깊은 정이 들었다. 이제는 특별한 음식이라도 보면 시부모님이 먼저 생각이나서 가지고 가게 됐다. 시집에 가면 마음이 편하게 됐다.
* 공주 영평사 구절초 축제에 같이 간 남편,나, 시누이형님, 시어머니, 시아버지(여자는 모두 앉았다)
지난 일요일에 낮시간이 잠시 난다는 남편을 졸라서 시부모님과 시누이형님을 모시고 가까운 공주에 있는 영평사 구절초(들국화) 축제에 다녀왔다. 왕복 4시간이 걸렸다.
시골집은 큰동서 형님의 친정식구들이 사용해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미리 예약을 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법칙을 정해 놓은 분은 아버님이시다. 우리 시집식구들도 시골에 가면 풀만 뽑지 말고 단체로 놀러갔으면 좋겠다.
영평사에서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는 시누이형님과 남편이 잘 모시고 다녔다. 영평사는 작고 아담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구절초 차를 한 잔씩 마셨다. (6,000원어치). 작고 잔잔한 흰들국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평화로와졌다.
절 입구에 있는 상점가에서 언어 장애인들이 파는 옥수수를 5개에 10,000원을 주고 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모두 옥수수를 먹으며 왔다.
5. 우리 부부에게 남은 세월은 사랑하기에도 너무 짧다
* 남편은 흰머리가 멋지다며 염색을 안한다. 나도 눈은 쳐졌어도 점점 편한 표정으로 변하고 있다. (나는 앉았다)
집에 오자마자 다시 서점으로 갔다가 밤 늦게 돌아 온 남편에게 내가 물었다.
"여보! 친척들은 모두 공무원이라서 퇴직 후 연금으로 편하게 살아가는데 ,당신은 힘들게 돈을 벌어서 나를 먹여살리네"
" 그 정도 힘이 안들고 살 수가 있나? 안 힘들어 "
" 그래 , 건강하면 다 좋아. 우리 사이좋게 살자. 남은 세월이 얼마가 됐든지 당신은 무조건 나보다 오래 살아야해 "
"걱정말어. 당신이나 살을 빼서 건강하게 살자. 건강때문에 살을 빼야 해."
" 그래 내가 10Kg만 빼면 좋겠지? 그럼 예쁘겠지? 이제 발목도 안 아프니까 내가 살을 뺀다 . 여보! 나이 60에 나같이 애교있는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구해"
" 응 (소리없이 웃는다) 나는 하늘과 땅,그리고 당신에게 감사해 ."
내 나이 60세이고 남편은 환갑이다.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남편과 100% 화해를 하고 일심동체가 된 지금이 참 좋다. 남편을 미워한 세월이 너무 길었다. 언젠가 그 세월을 후회하지 않도록 나는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 싶다. 지금 다른 부족한 것들은 내겐 아무 문제가 안되고 있다. 남편도 내 곁에 있을 때 제일 편하기를 바란다.
내 곁에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내가 이런 마음이 될 것을 상상도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한 번 살아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겸손히 기도하며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싶다.
** 시아버님(89세)께서 늘 제 블로그를 정독하십니다.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캡쳐를 하고 있습니다. 이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