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인생관까지 바꾸어 준 고마운 블로그

모과 2010. 3. 24. 18:55

내 나이 25세때 ,시골읍 소재지 남중 2학년  교실에서 수학을 열심히 풀던 나는 순간 머리에서 전기가 번쩍났다. 늘 풀던 아주 쉬운 수학 문제가 전혀 생각이 안났다.

" 애들아! 이다음이 뭐지? 뭐냐? 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지?'

 한 학생을 나오라고 해서 풀고 설명하라고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있다 누가 교실문을 노크를 하였다.

대학 후배가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전해주었다.

'김선생님 !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하셨데요"

가슴이 덜컥내려 앉으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 돌아 가셨데요?"

'아니요. 그냥 교통사고가 났다고 연락만 왔어요' 

  24살 후배 선생은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떨어지고 있었다.

 

교무실에 오니 모두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교감선생님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어봤다.

"중간고사 문제는 출제 했어요?'

중간고사는 아직 20일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가 돌아 가셨나 보구나 "생각했다. 가슴이 떨리면서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주체를 할 수가 없이  흘렀다.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 가면서  "살아 계실거야" '돌아 가셨을거야" 수없이 생각했다.

9월말 가을 하늘은 너무 맑고 아름답고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 아! 내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하늘이 맑을 수가 있을까?"

 

수업 중에 멍했던 순간에  내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택시로 적십자 병원으로 가던 중 돌아 가셨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어머니의 사진,  내가 22살 대학 4학년 5월 대학축제 때 남자 파트너 대신에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다른 여대생의 남자 파트너 중에 자기라면 파트너 대신 부모님을 모시고 오겠다고 말들을 해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20살 차이가 난다 . 어머니는 42세 젊은 나이였다. 3년 후 돌아 가셨다. 살아계시면 79세가 되셨다.아버지가 돌아 가신지도 22년이 지났다.

 

 

내 인생에서 제일  절박하고 앞 뒤가 다 막힌 것 같은  순간을 맞이 한 것이다.

이북에서 내려오신 아버지는 친척이라고는 큰아버지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부터 불성실한 삶을 사셨다고 큰아버지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가 않았다. 계수씨가 죽었는데도 강아지가 제왕절개로 출산을 해야 한다며 그냥 갔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다. 큰아버지는 수의사였다.나중에 들으니 개가 출산하다 죽으면 모두 보상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백내장 수술로 한쪽 눈은 실명을 하셨고 한 달 후 나머지 눈도 수술하기로 날짜가 잡혀 있었다. 수술이 실패하면 맹인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큰 남동생은 군에 입대한지 3개월이 됐고 국군의 날 행사 때문에 관보가 잘 전달이 안됐다.

연년생인 여동생은 병원에서 퇴원을 한 직후라서 몸이 편하지 않았다.

막내 남동생은  고2 였다.

큰 남동생이 급하게 휴가를 오고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나서야 장례식을 치룰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장례식을 치루었다.

고맙게도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해주었다. 청년회원들이 어머니 관을 들어 주었고 집사님들은 모두 소복을 입었다. 

탄현 기독교 공원묘지에 가서 장지도 내가 정하고 ,관과 수의도 다 내가 정했다.

교통사고니까 보상금과 조의금으로 장례식을 마쳤다.

 

나는 7번을 기절하면서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했다.

졸업도 전에 몸이 아파서 어머니에게 불효를 한게 미안해서 무척 많이 울었다.

 

 그후부터 나는 어떤 큰일을 당해도 눈물이 잘 나오지 않고 담담하게 대하게 됐다.

성실하게 독하게 특히 자녀 교육에 열성을 다한 어머니는 늘 120살 까지 오래 살고 싶어했다.

내가 결혼을 하면 손자,손녀를 다 키워준다고 했다.그런 어머니가 45세 젊은 나이에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다.

 

나는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예에  집착과 욕심을 버리게 됐다. 25살 어린 나이에 ....그리 됐었다.

 고생만 하다 돌아 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깊은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됐다.

어머니의  일생이 너무 허무했다.

 

나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열정의 내부에는 깊은 허무가 늘 깔려 있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도 늘 느끼는 생활이었다.

살아오면서 운명적으로 크게 5번정도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서 어쨌든 살아야 했고 견뎌야했다.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은 힘든 상황도 "다 지나갔다"  내가 보낸 인생은 그랬다.

 

 그 고난을 견디기위해서 나는 무엇인가에 몰입을 해야 견딜 수가 있었다.

책,자식,  영화, 그리고 블로그 순서였다.

 

시작은 컴맹으로 호기심으로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대전 시청에도 가서 "블로그 기자단"으로 서있게 돼 있었다. 그저 꾸준히 했을 뿐이다. 블로그가 재미있고 다른 블로그에 가서 글들을 읽으며 세상을 알아갔다.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의 "교과부 블로그 기자단" 으로 단체 사진 속에서 서 있게 됐다. 

 

 * "교육과학기술부기자단" 발대식에서 ,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서 있는 나.

 

블로그를 만 4년하면서 나는 허무주의에서 진실로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됐다.

늘 불안과 우울을 깔고 살았던 생활에서 그 회색빛 우울함을  스스로 걷어 낼 수가 있었다.

왜 나만 ? 이란 억울함에서 모든 사람이 다 각자의 불행을 짊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독서광이었던 내가 블로그의 글들을 읽으며 따끈따근한 살아 가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 것이다.

100인 100색의 다른 색깔의 삶을 바라보면서 나의 삶도 그 중에 하나임을 깨닫고 힘을 얻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의 나는  60%의 긍정과 40%의 우울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블로그를 5년 째 하는 나는 80%의 긍정과 20%의 우울함이 있는 사람으로 변화됐다.

 

지금의 나는 하루중 90%가 평온하고 잔잔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블로그를 알게 되고 시작한 나는 일생의 큰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 이글은  다음뷰의 요리부분 1위인 '옥이님"에게 바통을 이어 받은 질문중에 하나입니다.

1. 모과님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에 대한 긴 답입니다. 나머지 질문도 답하겠습니다.

 

2. 모과님에게 가족이란 ?

 

제게 가족이란  삶의 목표이며 책임이며 기쁨의 원천입니다.

59년을 살아 오면서 자식은 제게 기쁨만을 주었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두 아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온유하고 착한 남편은 한 때 (근 10여년)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서로 미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배려하고  이해 하려고 노력해서 이제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됐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친구이자 동반자인 남편이 곁에 있어서 너무고맙습니다.

 

 

3. 모과님은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제자는 어떤 제자입니까?

 

교사생활 약 8년중에 남중과 여고에서 근무했습니다.

몇몇 제자가 생각나지만  가장 불행했던 여제자가 떠오릅니다.

서울의 높은 공직자의 딸이었는데 아빠의 고향인 시골읍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집이 부유해서 과외를 시켰는데 중3 때 대학생 과외 선생을 좋아해서 성관계까지 맺게 됐습니다.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고  정신병을 일으켜서 휴학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전학을 온 제자입니다.  할머니집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급 친구들과 잘 지내다가  몸이 건강해져서 다시 서울로 전학을 갔습니다.

소문 때문에 왕따를 당하고 다시 시골 학교  우리 반으로 오고 싶다고 한 일이 있습니다.

시골학교에서도 서울학교에서 받기를 꺼려 하는 학생을 왜 우리 학교는 두 번이나 받아야 하느냐는 교사도 있었습니다. 새학기에 전학을 온다고 했었는데 제가 결혼을 하고 그 학교를 떠나서 소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요즘 여중생 성폭행 사건이 생겨서 그 제자의 하얗고 병색이 짙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쯤 50살이 됐겠네요.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4. 모과님은 악풀을 어떻게 대처 합니까?

 

저는 악풀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요즘 들어서 갑자기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즉시 차단 ,삭제 신고에 들어 갑니다.

그리고 댓글의 기능을 "전체'에서 "로그인"회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저는 다른 블로그에 가서 글을 읽고 다른이들의 댓글과 답글도 거의 다 보고 옵니다.

제 블로그에 와서 자기 댓글만 다는 분들에게는  같은 답글을 중복적으로 달지 않습니다.

제목만 보고 댓글을 다는 분들도 타당성이 없고  억지이면 삭제 합니다.

 

 

5. 모과님은 블로그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미래의 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블로그에 매일 2~5시간씩 글을 써왔습니다.

본래 글쓰기를 좋아 합니다.  장편소설, 논픽션등에 응모했다 탈락한 경험도 있습니다.

단편소설이나 논픽션을 써서  당선되고 싶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방송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드라마"부분을 배우고 싶습니다.

 

"교과부블로그 기자단'이 되고 대전의 어느 대학에서 학과 인터뷰 요청도 받았습니다.

'대전시 블로그기자단'을 하면서 대전을  저도 알고 다른 분들에게도  제대로 알리고 싶습니다.

"교과부 블로그 기자단'을 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교사를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자녀교육을 훌륭하게 시킨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나라 교육을 긍정적으로 변화 시키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 목표는 5,60대 롤모델이 되서  중,고등학교,대학교, 복지관등에 가서 " 행복한 교육'을 강의하고 싶습니다.

 60이 다되서  사회 강사가 된 최윤희 선생님이나  60이 넘어서 "아침 마당'을 통해서 강사까지 된 엄앵란 선생님이 저의 롤 모델입니다.

 

 

** 릴레이 바통을 이어온 발자취를 남깁니다.

 

코코페리-불법미인-초보-Ari.es-배치기-현루-에카-루마누오-존스미스-건댕이-알루카-신호등-키리네-Milk-몽쉘-잉어-crimson-케이온-희우유-로라이사-Hurvderika-ㅡmepi-차원이동자-네리아리-OO 엑스-Enczel-M.T.L-SLA-Visualvoyage-악의축-보시니-phoebe-Zorro-못된준코-938호-오러-밸글-샤방한  MJ-파르르-바람될래-박씨아저씨-왕비님-경빈마마님-옥이님-모과........** 중간에   OO엑스님은  한자를 몰라서  OO으로  했습니다. ㅎㅎ

 

* 제 바통을 받으실 분은  농촌 전문 블로거인 "들꽃님'과 "봉황52님"입니다.

저는 블로그를 하면서 농촌 블로거들을 알게 된 것이 큰 즐거움이고 행운입니다.

이분들의 삶속에서 우리 나라 농촌의 앞날을 봅니다.

모든 블로거들에게 이분들을 알리고 싶습니다.

 

*들꽃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1. 들꽃님은 귀농을 하시기전에  직장맘이셨는데 무슨일을 하셨나요?

 

2. 자녀분과 며느님중  세명이 교사인데 들꽃님의 자녀 교육관은 무엇인가요?

 

3. 들꽃님은 블로그를 하면서 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4. 인생을 살면서 제일 기뻤던 때는 언제입니까?

 

5. 블로그를  통해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나, 자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 봉황52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1. 봉황52님은  도시처녀로서 농촌 총각과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 전에는 무슨일을 하셨나요?

 

2. 따님이 이번에  서울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을 했는데 특별한 교육방법은 무엇인가요?

 

3. 농촌 생활을 하시면서 제일 보람된 일은 무엇이고 힘든일은 무엇인가요?

 

4. 블로그를 하고 봉황52님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5. 블로그를 통해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