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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손해만 보며 자란 둘째 아들

모과 2010. 3. 2. 06:30

내 인생에서 단 한번 돌아 갈 기회를 준다면 38세 로 가고 싶다.

막내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다.

그시절으로 다시 간다면 막내 아들에게 좀 더 정성을 들여 주고 싶어서이다.

나는  37세 겨울에 "기관지 확장증"으로 오른쪽 폐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했다.

아이들을 대전의 큰형님 댁에 맡기고 수술을 하려면 겨울방학을 이용해야 했다.

다음 해에 막내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할 때는  나는 너무 좋아서  결혼기념일조차 잊어 버렸다.

2월8일이 예비 소집일이었는 가슴이 설레여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2월9일이  결혼 기념일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오는 기념일이나 생일을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입학식을 하고 일 주일 참관 수업을 할 때  큰아들은 불안해서  창 밖의 엄마를 자꾸 돌아다 보았다.

12월 생이라서 키도 작아서 앞에서 두번 째에 앉았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져서 내가 직접 가르쳤다.

대학 4년 간의 과외경험과 8년의 교사 경험을 총동원해서 최선으로 가르쳤다. 내 능력의 최대치로 최선을 다해서 교육에 신경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불안 해서 아파트에 소문난 똑똑아이의 집에 찾아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노하우를  배우고 왔다.

 

그 때마다 3살 아래인 막내는 "나가 놀아라"고 했다. 자꾸 참견하고 싶어서 책상으로 달라 붙어서 귀찮게 해서 그렇게 했는데 지금생각하니 너무 잘못 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막내 아들은 참 잘논다. 어디를 가나 분위기 메이커이다.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심지어 여러 파트에서 회비를 내지 않아도 좋으니 참석만 해 달라고 했을 정도이다.

 

 막내는  I Q가 높아서  학교 수업만 듣고 수학을 늘 백점을 맞았다. 큰 아들은 수학을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내용을 70%만 알아 듣는다고 해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 과는  대조적이었다.

막내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 국어 공책에 쓴 글은 "경필쓰기"상을 받았다. 1학년 담임이 남자분이었는데 그공책을 보관하고 싶다고 했다. 사모님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고 해서 공책을 드린 적이있다.

만약 큰 아들에게 쏱은 정성만큼 막내에게도 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글씨지도도 계속하지 않으니까 도로 악필이 됐다.

"초등학교 1학년이 어떻게 이렇게 글씨를 잘쓰냐'고 했던 아이가 그렇게 됐다.

공부는 좋은 습관이며 꾸준히 해야 하는 반대상황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모두 나의 지도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큰수술을 한 후유증으로 한시간 일을 하면 한 시간 쉬어야하는 체질로 변했다.

큰 아들이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니까 더 정성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막내에게도 똑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지도를 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 했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막내가 대답을 한 것이 걸작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 가면  엄마는 집에서 무얼하고 있을 까요?

" 우리  엄마는 이불깔고 누워 자고 계십니다"

나는 그 때 재미있다고 웃었다. 사실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고 막내에게 미안한 일이다.

막내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일 년에 20kg 씩 체중이 늘었다. 중1 말에는 105 kg 까지 나갔었다.

몸이 너무 뚱뚱하니까  공부에도 지장이 있었다. 시험때도 책상에 앉아 있다가 9시만 넘으면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성적이 점점 떨어졌다.

초등학교때까지 막내가 시험 점수를 좀 적게 받아와도 그냥 귀엽고 걱정도 안 되었다.

성격이 엉뚱하고 독특해서 식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막내가 그냥 좋기만 했다.

 

그 때는 식탐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욕구 불만을 먹는 것으로 해소한 듯하다.

사실 나는 막내가 큰 아들보다 키가 클 줄 알았다. 중2때 부터 중3까지 35kg을 감량을 해서 부작용으로 키가 자라지 않았다. 중2때 키 177cm에서 키가 멈췄다.

50명중에서 27등까지 성적이 떨어지자 밤에 잠이 오지가 않았다.

그 때 나는 몸은 많이 회복이 됐지만  장사를 해서 하루종일 상점 안에 있어야 할 형편이었다.

 

 * 막내 아들이 대학때 자취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피부도 하얗고  잘놀아서 인기도 좋은 편이다.시댁식구들은 막내보고 영화배우같다고 말해 준다.실제 피부도 매우좋고 하얗지만  배우정도로 잘생기지는 않았다..

 

 다행히 체중을 뺀 후 막내는 공부도 무섭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형이 공부를 할 때 나가 놀기만하고 독서를 안해서 문제가 됐다.

수학,과학은 수를 받는데 국어가 늘 미 를 받았다.

 

수능을 본 후 교문밖으로 나온 막내의 말이 결정적으로 언어 교육의 부족함을 말해준다.

"엄마! 언어 빼고 다 잘 본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쏴 해졌다.

그 해 막내는 언어 120점 만점에 70점을 받았다. 수탐과 과탐은 만점이었다.

 

결국 재수를 했고 다음해 언어점수는 105점이었다.

400점 만점에 370점이 넘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을 때라서 서울로 둘이나 사립학교를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대전의 국립대학교 경영학부에 들어 갈 점수만 나왔으면 생각했다.

 나는 참 나쁜 엄마였다. 마음속의 생각도 기도였는지 특차로 아빠 고향인 대전의 국립대학교 경상학부에 합격을 했다. 기숙사도 됐다.

만약 막내에게 큰아들에게 했듯이 매일 일기 지도도 하고 예습복습을 철저히 시키고, 나가놀라고 하지않고 독서 지도를 했다면 언어점수는 걱정을 안해도 됐을 것이다.

 

나는 가끔 막내에게  "미안하다" 고 말한다.

"엄마가 미안하실 이유가  없어요. 제가 공부를 안해서인데요.괜찮아요"

 

연휴라서 집에 내려온 큰아들에게 내가 말했다.

"   엄마가 너에게 신경 쓰느라고 막내는 맨날  놀이터에 나가 놀으라고 해서 지금도 미안하다.

너 때문에 희생된 부분이 있으니까 네가 잘 기억했다가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서로 어려울때는도와주고 ....엄마는 대전에 살면서 막내가 결혼을 하면  손자 손녀를 봐 줄거야. 미안해서 꼭 그럴거야. 큰엄마들은 사촌형들이 결혼할 때 집을 사주거나 전세 아파트라도 얻어 주셨지만 엄마는 그렇게 못하니까 아기를 봐줄거야. 공부도 봐주고 "

 

그동안 나는 두아들을 편애  없이 키운다고 노력을 많이 했다 .

그러나 막내 아들에게는 건강이 때문이지만  잘 못해준 것이 사실이다.

나는 막내에게 빚을 진 기분이다. 살아 가면서 사랑으로 갚아갈 마음의 빚을 진 것이다.

 

 막내는 대학에 들어 가서 충남,대전의 성실한 동기,후배를 만나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취업 스타디도 만들어서 영어 ,면접 공부도 했다.

다행히 졸업 전에 대기업 유통마트에 취업이 되서  대전 지사에 발령을 받았다.

성실하게 근무하고 인간성이 좋아서  동기, 후배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다.

며칠전에 막내가 내게 말했다

"엄마! 나 그때 취직 잘한 것 같아. 지금까지 취직못하고 그냥 있는 애들이 좀 돼요"

"그럼 열심히 일하다 보면 누가 끌어 가더라도 끌어 가는게 회사의 법칙이다. 지위를 바라보고 일하면 오래 못간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가 바라 보던  자리에 가 있는 거야. 성공한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

 

대전에서 살면 삶의 질이 높아 지는 것 같다.  인구 밀도가 넓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고 둘이 맞벌이를 하면 몇 년 안에 집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막내 아들과 대전에 함께 살면서 손자 손녀를 남편과 돌봐주면서 행복하게 살 것이다.

막내 아들에게 못해준 것을 앞으로 손자,손녀에게  더 잘해주면서 갚아 나갈 것이다.

 

 

** 이글은 막내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기록하고 싶어서 썼습니다.

제가 체중감량을 하려고 하는 것도 ,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는 것도 남편과 아들들과 더 즐겁게 살려는 노력입니다. 블로그를 하는 것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행복해 지려고 블로그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