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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째 사랑하는 이에게

모과 2010. 2. 10. 07:55

어제가 결혼 33번째 기념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참 변화있는 사랑을 하고 살았다.

수줍은 5년의  신혼의사랑, 아기 자기한 8년간의 사랑, 전쟁같이 서로 미워하던 10년의 사랑 ,화해의 사랑을 5년 ,그리고 이제야  온전히 하나가 된 편안한 사랑을 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한지 30년이 넘으면 천생연분 이라고 하는가 보다.

 

남편이 28세 ,내가 26세인  늦가을에 우리는 중매로 만났다.

 나는 경기도의 소읍의 남중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고 남편은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조교와 번역일을 하고 있었다.내가 하숙을 하던 하숙집 아주머니가 좋게 보고 남편의 이모에게 나를 소개를 시켰다.

두 분은 여고 동창생이었다.

맞선을 보고 나에게 첫눈에 반한 남편이 (제 눈에 안경이니까^^)적극적인 대쉬로 결혼은 빨리 진행이 되었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여고와 대학 10년 선배가 남편을 보고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유한 것도 도움이 됐다.

어떨결에 결혼을  3달 만에 속성으로 하고 나니 남편이 여러 모로 어려웠다.

나는  고 1때 결혼이 무척 하고 싶었었는데 내 남편이 될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서 뭘하고 있을 지 궁금했다.나와 전혀 상관도 없는 대전시의 어느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픽픽 웃음이 났다. 남편은 중2 때 몸이 아파서 1년을 휴학을 했었다.

나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빠른 생일이였다. 남편과 나는 호적상으로는 동갑으로 돼 있다.

 

남편은 조용하고 말수도 적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작은 키가 컴플랙스여서 나의  다른 조건이 다 좋아도 키가 적었으면 결혼을 안했을 거라고 했다.

나의 키 165cm, 남편의 키  164cm (나와 같다고 했으나 군사 수첩을 보고 알았음)에서 두아들은 179cm,177 cm이니 키에 대한 한은 확실히 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루저라고 한다든데...^^

나는 루저와 결혼해서 33년을 잘 살고 있다.

 

남편이 대학원을 졸업을 하고 부산의 한 대학에 전임 강사가 됐다.

부산의 해운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서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이 28년이나 계속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큰아들이 유치원, 막내가 4살때 전국에서 제일 크다는 주공아파트의 잔디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내 일생에서 전업 주부로서 제일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어디를 가도 밝고 맑다는 소리를 들었다." 저런 며느리를 보고 싶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부부 싸움은 커녕 큰 소리 한번 나지 않았던 조용하고 편안한 날들이었다.

 

큰아들이 유아원을 졸업 할 때 찍은 사진이다. 33세살의 나는 얼굴에 그늘이 전혀 없이 완벽하게 행복했었다.그런 세월이 신혼초 부터  13년이 계속되었다.

 

큰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불행의 그늘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다.

악연의 만남과 남편은 큰 잘못 없이 실직이 됐다.(구체적인  내용은 생략)

작은 아파트를 팔아서 전세로 갔고 남편은 내가 반대하는 사업만 골라서 하는 것 같았다.

고지식하고 정직한 남편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사람도 많았다.

내 남편을 좋다고 악착같이 쫒아 다니며 호시탐탐 내 자리를 노리던 어리석은 여자도 만났다.

나는 의연하게  최대한으로 예우를 해주어서 그 여성으로부터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게 했다.내가 어떻게 가꾸고 일군 가정인데 여자 친구라는 나부랭이가 뭔 대수란 말인가!

" 친구 좋아 한다. 남녀 사이에 무슨 친구가 된단 말인가?  친구 나부랭이가  조강지처의 깊은 사랑을 알기나 하는냐. 지랄 그만해라. "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는 무심히 대했다. 

그 여자가 잘못 산 인생의 댓가는 자기가 받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벼룩의 간도 내먹는다는 속담을 이해한다.

남편에게  그렇게 치사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었다.

남편과  전쟁같은 사랑이 10년이 계속되었다.

그전의 13년의 온전한 행복이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무진장 싸웠다.

내눈에는 분명히 실패가 훤히 보이는데 주변 사람들이 권유하고 동업을 하고 ,망하기를 몇번 반복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들, 반대 하니까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 오니까 불안해서 잔소리를 하고 ....그때 우리는 서로 웬수같이 미워했던 것 같다. 나만 아니고 남편도 나를 미워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남편과 화해를 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때를 전쟁같은 사랑의 기간이라고 말한다. 이제 돌이켜 보면 애정이 있으니 악착같이 싸운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두 아들들은 깊은 상처를 받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현실을 이겨냈다.

엄마가 아플까봐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중,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대학을 들어갔다. 군에도 다녀 오더니 두 아들 다 의젓하게 부모를 돌보는 보호자의 자세가 되가고 있었다.

그 사이 남편은 대형마트에 즉석식품을 납품을 하는 사업을 왕창 망하고 사업을 그만 두었다.

 

인척의 소개로 마트안의 대형 서점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중소기업에 취업을 하게 됐다..

영남의 구미, 대구, 부산,울산, 김해, 전라도의 광양,등에 있는 서점 10개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되면서 남편의 성실성과 독함이 나왔다.

봄,가을에는 전국  국립,사립 대학에 책을 판매하는 일을 섭외하러  충청,전라,경상도의 대학에 출장을 다녔다.그 회사에 취업이 되면서 남편과 나는 서서히 화해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전쟁같은 싸움을 10년 하면서 서로 상처가 많아서 치유되는데 5년이 걸렸다.

남편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고향 대전으로 돌아 가고 싶다! 빨리 가야한다."

 

 

** 가족 사진 대신 행복한 느낌이 드는  꽃밭 사진으로 교체했습니다. 가족의  초상권을 보호해야 하는데 블로그 이웃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잠시 보여 드렸습니다.

 

우리 아들들은 부모의 싸우는 모습과 화해의 과정을 다 보고 자랐다.

예전에는 "그렇게 싸우지 말고 이혼을 하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끝없는 가족에 대한 봉사와 사랑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가족들의 얼어 붙었던 마음을 녹여주었다. 시댁 식구들도 한결같이 우리 가족들에게 잘했다. 말로 칭찬해주고  반찬으로 곡식으로 모두들 잘해주었다. 요즈음 아들들은 내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힘이 들때 이혼을 하지 않고 견디고 살아 준 것 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서로 말하곤 한다.

좋은 어른들이 친가 식구들인 것은 아주 귀한 재산인 것을 살수록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대전에 우리 회사 지점이 생기게 되면서 남편이 시누이 형님과 함께 서점을 하게 됐다.

 바라던 일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게 기적과 같이 느껴진다.여러가지 상황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막내도 고향인 대전의 국립대학을 졸업을 하고 졸업 전에 취업이 되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됐다

 내가 바라던 잔잔한 평화가 흐르는 일상의 연속이다..

 

요즘 진잠 동사무소 이층의 "노래 교실'에 다니고 있다.

어제 갔더니 가르쳐 준 노래가 "송약국집  O S T : 사랑하는이에게' 였다.

노래 가사 중에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부부이 있었다.

 

"세월 지나니 후회가 되오.좀 더 따뜻하게 해줄것을

남은 날이 너무 짧아 미안하오 사랑하오.

다시 태어나도 사랑하오.오래오래  곁에  있어주오 "

 

나는  다시 태어 나고 싶을 정도로 이 세상에 애착이 없다.

그냥 태어 났으니까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뭐 대단한게 있다고 다시 태어나고 싶겠는가? 나는 다시 태어나서 되고 싶은 것도 전혀 없다.

 

결혼 33주 년인 오늘 남편은 공주,부여로 한 바퀴 돌고 오자고 했다.

하루종일  비가 부슬부슬 와서 온 몸이 아팠다.  구정에 내려 올 큰 아들을 위해서 집안도 깨끗하게 치워 놓고 싶다. 나는 남편에게  3월에 가자고 했다. 온천지가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변화되는  봄에 여행을 가는게 좋겠다.

좀 일찍 퇴근한 남편과 동네의 식당에 가서 동태 해물찜으로 소주 잔을 곁들였다.

 

 

작년에도 이집에서 해물찜으로   소주 2병과 밥 한공기를 해물찜을 먹었던 생각이 났다. 가격도 작년과 똑같이 27,000원이었다.  나는 소주 3잔을 마셨다.

 

 .

밤 9시가 되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둘이 말이 없었다. 함께 살면서 그때 그때 할 말은 다하고 사니 밖에 나와서는  별로 할말이 없었다.

묵묵히 밥과 안주를 먹으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조용한 평화와 침묵이 참 좋다.

둘이서 한 우산을 쓰고 남편 팔에 팔짱을 끼고  집으로 걸어 오면서 작년보다 더 평화로움을 느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다지  좋은 아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큰 아들을 낳을 때 3일이나 진통을 하고 난산을 해서  남편 눈에 눈물을 흘리게 했다.

37살에는 오른 쪽 페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해서 또 남편을 울렸다.

그 후 쉽게 피로가 와서 자주 누워 있었고 ,음식솜씨,살림 솜씨도 없는 아내였다.

그와 함께 할 날들이 함께 한 33년보다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앞으로 점점 둘 중에 한명은 병약한 몸으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럴 확률이 더 많다.

앞으로의 생활에서 남편은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로서, 친구이며, 동반자로 함께 갈 것이다.

그가 없는 노년은 생각하기가 정말 싫다.

 

 

 집에만 오면 "스토쿠"에  열중인 남편, 블로그에  살짝 중독된 아내 둘이서 오손도손 살고 있다.

남편은 뉴스채널과 바둑에서 백분토론과 경제 뉴스에서 이제 "스토쿠"로 취미가 바꼈다.

나는 활자 중독에서 블로그 중독으로 종목을 바꿨다.

 

우리는 서로의 취미에 대해서 타박을 하지 않는다.

남편은 나의 블로그에 관심이 많아서 내 글을 다 읽고 맞춤법을 고쳐주고 있다.

 

결혼 33년차 부부의 가장 큰 관심은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과 자식들의 앞날 걱정이다.

그 문제가 우리 부부가 협심해서  살아 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 가고 있다.

 

 

아내로서 나는 요즘 절실히 느끼는 것이 있다.

 정말 좀 더 따뜻하게 해 줄 것을.... 세월이 지나니 후회가 된다.

이제 부터라도 더 다정하게 더 아껴주며 살아 가고 싶다.

나의 결혼 33주년은 나의 부족함만을 깨닫고 지나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