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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조 왕따였다.

모과 2009. 12. 14. 18:19

내가 고 1이었던 1967년도에는 "왕따"라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당시  학급 친구들이 재수없어 하는 왕따였는데 나는  모르고 다녔던 것 같다.

내가 공부를 안해서 고교입시에 떨어져  놓고 이유없는 반항을 한 시절이기도 했다. 무조건 학교가 싫고  특이한 교복도 싫었다.

나는 공부가 무조건 하기 싫다는 말을 이해 하고 있다.

공부가 그냥 하기싫지 무슨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소위 명문 여중이라는 데서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지만 64명중에 20등안에는 늘 들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성적이었다.사실 반에서 40등 까지는 본교의 고등학교를 거의 다 합격을 했기 때문이다.지방에서는 전교 1,2등을 해야 입학을 할 수 있는 고등학교였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서울에서 공부를 했던 나는 중3 ,11월부터 공부를 아예 안했다.

 T V 드라마와 영화,책에 취미가 붙어서 그냥 놀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

딱 3개월을 책을 전혀 들여다 보지않고 놀았더니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져 버렸다.학교에서는 담임도 친구들도 내가 실패를 한 것을 이해 못했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반성을 안하고 공부는 계속 하기 싫었고  후기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끄럽고 싫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 두고 하고싶은 것도 없었다.

 

 

* 사진 출처 마지막 승부 :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

 

1. 입학식 다음 날 지각을 했다.

 

입학식 다음날 부터 지각을 해서 운동장 20바퀴를 뛰었다.

교감선생님이 함께 뛰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하셨다.

운동장을 다 뛰고 나니 얼굴은 벌개지고 땀투성이에 머리는 흐트러진 모습이 됐다.

이미 수업이 한 시간 끝난 교실문을 열고 들어 가니  반 친구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 보았다. 입학과 동시에 이상한 아이로 인식이 돼 갔다.

 

내 짝꿍은 입학식에 잠깐 본 짝이 한 시간이 되도 안오자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내모습을 보고 노골적으로 실망을 하는 표정을 했다.

 

 

2. 쉬는 시간마다 거울을 보는 여학생. 

 

중학교 때는 단발머리에 교복이 몸배 바지 같이 생겨서 단정은 했으니 예쁘지는 않았다. 중학교 2학년때 담임의  추천으로 우리반 "정건상" 후보로 나가게 된 적이 있었다. 가장 그 학교 여학생다운 단정한 여학생을 뽑는 연례 행사였다.

각 반 대표가 뒤돌아 서서 있으면 그 학년 학생들이  추천하고 싶은 학생 뒤에 가서 서는 것이 었다. 물론  최종 1명에는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외모도 그렇게 뒤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 사진 출처: 마지막승부"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도 머리를 길게 따고 다녔습니다.물론 저는 심은하 보다  심히 못났지요. 예전 교복을 찾던 중에 눈에 띄여서 인용합니다. 욕하지 마세요~~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려면 다른 교실 앞을 지나서 복도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거울 앞을 지나게 된다. 나는 화장실 갈 때마다 거울 앞에서 미소도 지어보고 예쁜 표정을 지어보곤 했다.

거울이 있는 바로 옆반 아이들이 킥킥대며 웃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 반에는 고2 때 한 반이 되서 절친이 될 친구도 있었다.

내 일생 중에서 공부를 제일 안한 때가 고1이었던 것 같다.

숙제는 늘 안해 갔고 자주 지각을 했고  가정부 언니를 시켜서 전화하게 하고 학교도 안갔다.아프다고 하고 학교에 안가고는 그냥 집에서 소설을 읽었다.

 

내가 읽었던 책의 1/5은  고1때 읽었던 것같다.

국내 단편소설, 장편소설, 해외 명작소설, 베스트셀러 소설....밤을 새고 책을 읽었다. 비록 공부를 안해서 겨우 낙제를 면하고 꼴찌로 고2에 진급했지만  나는 문학에 몰두했던 그 시절이 참 좋다.

부모님의 모조건 믿어 주는 가정교육 때문에 탈선을 안하고 소설만 읽은 것이다.고1때 만난 담임 선생님깨서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인정해 주셔서 낙제할 성적으로 겨우 진급을 했다.

선생님은 17개 과목 담당 교사를 다 만나서 나를 진급 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고 다니셨다고 했다.그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수학은 잘하니까 이과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7반이 입학을 했는데 한 반을 낙제 시키고 6반이 고2가 됐다. 문과 4반 이과 2반으로 편성했다.

 

고2가 되고 반이 정해졌다.

운동장에서 (2- 6반 )표지판을 들고 있는 학생 앞에 줄을 서는 것이다.

그런데 고 1때 친구를 별로  사귀지 않은   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친한 친구 한 명은 문과로 갔다.

서로 친한 사람하고 짝이 되려고들 하느데 나는 낄 자리가 없었다.

그 심정을 뭐라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부끄럽고  내 자신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학급 친구들을 모두 왕따를 시킨 것이지만 2학년이 되고  나는 내가 왕따였던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사진 출처: 마지막승부: 내용과 관계가 없습니다. 복장은 이학생보다 단정했습니다.그 때는 앞머리를 내리면 불량 학생이었습니다..

 

나는 그 때 같이  내자신이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내가 똥통학교라고 우습게 본 학교에서 낙제한 것을  선생님이 구걸해서 진급을 했다.,친구들도 모두 나를 재수없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깨달았다.

아마도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이런 상황이 아닐까? 하며 데미안을 생각했다.

 

3. 내 인생을 밝은 쪽으로 인도 해주고 함께 걸어 간 친구

 

 같은 반이 된 성실이와는  키가 비슷해서 60명중에 57번, 58번을 하면서 친해졌다.나와는 상반되는 성격으로 조용하고 성실하고 공부는 전교 3등안에 늘 들었다.공부를 무척 잘한 성실이는 특이하게  지각을 자주 하는 학생이었다.

대학도 같은 여대로 진학을 했는데 성실이는 생물과를 나는 물리학과를 갔다.

생물과에 나와 이름이 같은 학생이 있어서 무조건 친해졌다고 말해준 친구였다.

 

나는  인생의 위기점에서 늘 좋은 사람을 만났다.

초등학교때 서울로 전학을 시켜준 교육열이 높은 엄마.

고1때 공부를 안해서 낙제할 제자를 위해서 점수를 구걸하러 다닌 고마운 선생님.

친구없는 나와 친해줘서 공부까지 잘하게 해준 고마운 친구.

 

나의 인생을 위기에서 좋은 전환을 하게 해준 그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아들들을 키울 때나 교사 생활을 할 때 그 두 분을 기억하고

더 성실하게 임했음을 고백한다.

내 친구 성실이는 은행에 입사를 했고 나는 교사가 됐다.

 

부산으로 이사를 가고  세월이 가면서 내 쪽에서 친구들과 연락을 끓었었다.

삶이 곤두박질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다.

어느날 신문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은행 지점장이 된 친구 성실이의 기사를 보게 됐다. 나는 부산의 지점을 찾아가서 성실이의 연락처를 알았다.

그 후로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낸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잘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누군가의 인생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