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채점 후 바로 재수를 결심한 아들.
그 해도 어김없이 수능날 날씨는 엄청 추었다.
얼마나 추웠는지 작은 쥐가 상가 2층 계단으로 올라오다 얼어 죽어 있었다.
그 해가 쥐의 해인데 기분이 많이 좋지가 않았다.
낮에 집에 다녀 오는데 역시 작은 생쥐가 차에 납작하게 깔려서 죽어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아들과 따뜻한 우동을 먹고 집으로 돌아 왔다.
교육방송에서 정답을 방송하는 것을 보고 채점을 하던 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밤늦게 퇴근한 내게 아들은 결심을 말했다.
"엄마! 국립대학교 특차에 하나만 쓰고 안되면 재수를 하겠어요"
수능 점수가 발표 날때까지 한 달 동안에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바로 돌아 왔다.
친구들이 나와서 놀자고 해도 나가지 않았다.
점수는 채점한 것과 똑같이 나왔다.
1997년 큰 아들은 부산의 국립대학교 특,정시에 모두 떨어졌다.
2월에 졸업을 하고 바로 재수 학원에 등록을 했다.
내가 아들의 재수에 동의를 한 것은 5 가지 이유였다.
1. 초등학교부터 성실하게 꾸준히 공부를 한 성실성을 믿었다.
2. 고등학교 성적이 학급에서 늘 5등 이내에 들었다.
3. 집안 사정으로 학원이나 과외를 못받았다.
4. 재수 기간은 는 2월부터 10월까지 8개월로 사립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으로 가능해서였다.
5. 재수기간동안에는 내신점수에 신경을 쓰지 않고 ,경험많은 강사들에게 압축된 지식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고3 때 담임 선생님도 아들의 희망이 어나운서인 것을 이해하고 서울로 진학 할 것을 권유했다.[아들은 남편을 닮아서 목소리가 아주 좋다]
합숙 학원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아들의 기분 상태를 매일 알 수가 없어서였다.
사람이 어떻게 24시간을 공부만 할수가 있겠는가?
고3 때와 다른 점은 성적이 비슷한 학생들과 반 편성이 되서 진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그 때 부산은 지하철 2호선 공사가 한창 이었다.
집이 있는 동네의 버스 종점에서 범일동의 학원까지 한시간 이상이 걸렸다.
큰 아들은 맨 뒤에 앉아서 다녔다.
몸이 지치면 암기과목이 많은 날 하루는 결석을 하고 푹 잤다.
학원을 마치고 11시가 다되서 엄마가 하는 상가[책대여점]에 왔다.
셔터를 내리고 둘이서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대화를 했다.
하루종일 학원에서 있던 아들과 상점에서 있던 엄마가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걸었다.
주로 학원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 정신적으로 힘이 든 일 을 말해주었다.
아이들을 학원으로 학교로 보내고 나는 동네 뒷산을 오르며 기도를 했다.
책대여점을 찾는 수많은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다.사람들과의 대화에도 좋지 않은 말은 삼가했다.
그리하면 복이 우리 아들들에게 간다고 굳게 믿었다.
주말이면 통닭과 맥주를 마시며 많은 대화를 하곤 했다.
처음에는 맥주 한병을 둘이서 마셨는데 나중에는 각자 한병 씩으로 늘었다.
아니면 동생과 삼겹살에 음료수를 먹게 해주었다.
일요일 반나절은 무조건 자라고 권유했다.
수능은 11월 15일 전후에 있다.
학원은 10월말 까지만 다니고 집에서 복습을 하였다.
1998년 수능날에 나는 아들이 시험을 보는 학교의 대문앞에 서서 마음 속으로 기도를 했다.
가까운 교회에는 작은 기도의 방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를 했다.
상점으로 돌아 온 나는 수능 시간표를 책상에 부착해 놓고 기도를 했다.
너무 마음이 간절했기때문이었다.
아들은 최선으로 공부를 했고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전국 3%이내에 들었다.
전 해에 수학이 어려워서 올해는 쉽게 나올 것 같았다.
전 년도 수능 때 발표 됐던 수능 점수 분포도, 예상점수, 입학 가능한 학교의 점수등을 모두 스크랩해 두었었다.
1998년 수능 에서 아들은 전국 1.9%의 종합 성적이 나왔다.
언어 영역은 0.05%였다.
1997년도에 전국 12%에서 놀라운 상승이었다.
작년에 스크랩 해놓은 자료를 보니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 특차 장학생 점수였다.
문제의 난이도 때문에 수능 분포도의 %를 보고 비교를 했다.
어느날 상점에 있는데 집에 들어 간 큰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꿈같은 일이 방금 일어 났어."
"무슨일이?"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까치 이,삼십 마리가 날아 오더니 내 앞에 둥그렇게 앉아 있더니 날아 갔어"
정말 신기한 일이다.
까치가 많은 동네지만 그렇게 많은 까치는 못봤다.
1998년도 아들은 원하던 학교의 원하던 학과를 특차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어나운서가 되려고 표준말을 하는 서울로 유학을 갔으나 입학과 동시에 꿈을 접었다.
서울의 학생들은 많이 어나운서를 희망했고 너무 적은 숫자를 채용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이었지만 소질은 없다는 것을 강의 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아들은 대학 입학때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은행원이 됐다.
그것도 아주 적성에 맞는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일하고 있다.
** 재수가 꼭 필요한 학생이 있다.
그들에게 재수는 또 하나의 길이며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