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에 25살 새 엄마를 맞이한 큰 아주버님
시어머님은 남편의 새엄마로 오셨다.
남편이 7살에 병환으로 돌아 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은 사납다는 것 밖에 없다고 했다.
몇 년을 병환으로 계시다 돌아 가셨으니 어쩌면 당연한 기억이다.
무척 엄하시고 예쁘셨다고 기억들을 하셨다.
4남 1녀의 형제가 시고모님들과 조부모 손에 키워졌다.
3년 후 25세의 새엄마가 오셨다.
사범 학교를 졸업한 인태리 여성이었다.
큰 아주버님이 고2 였던 17살 때였다.
두 살 터울로 동생들이 줄줄이 네 명이나 있었다.
막내 동생은 7살이었다.
나는 전실 자식이 5명이나 있는 집에 새엄마로 오신 어머니도 대단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 추운 겨울날 .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큰형님이 자기 가방을 들어서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등교했던 기억을 하고 있다.
8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새 엄마에게 큰 아주버님은 깍듯하게 대하신다.
50 년이란 세월을 한결같이 그러셨다.
어머니에게도 큰 아주버님에게도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큰 형님과 어머니는 10살 차이가 난다.
큰 시누이 형님은 어머니와 13살 차이가 나지만 지금도 엄마라고 부른다.
새 어머니가 낳은 동생들을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위로 오빠가 둘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 있을 때 친 엄마가 돌아 가셨다.
고명 딸이어서 사랑받고 살아야 하는데 .엄마가 일찍 돌아 가셔서 고생만하고 희생을 했다.
그런데도 아버님이 걱정을 하실까봐서 매주 시골집에 내려 와서 일을 하고 김치를 담궈서 보내고 있다.
김치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해서 보낸다.
지난 일요일이 큰 아주버님의 생신이었다.
우리가 대전으로 이사 온 후 처음 있는 생신이어서 큰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 동서 ! 아직 어른들이 계시니까 큰 아빠 생신은 그냥 조용히 보내려구. 아버님과 어머님만 모시고.."
" 형님! 저는 밥을 안 주셔도 갔다 올거예요. 큰 아주버님 생신은 축하 해드리고 싶어요"
"그려! 초대는 못하지만 오는사람은 밥은 줄 수 있어" 하시며 웃으셨다.
가까운 곳에 사는 막내 시누이와 통화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막내 시누이 차를 타고 가는데 반찬 냄새가 솔솔나서 물었다.
"언니! 내가 못하니까 반찬 가게에서 샀어. 우리 동네 반찬 가게는 직접 그 자리에서 만들어,엄마 갇다 드릴려구"
' 아! 그럼 나도 다음에 갈 때 반찬을 사서 가지고 가야겠다"
음식 솜씨가 별로인 난 무척 좋은 소식을 들어서 기뻤다.
* 막내 시누이가 사온 반찬 : 모듬 나물, 파래무침, 작은 감자졸임, OOO...^^
시댁에 도착하니 안산의 시누이 형님이 와 있었다.
막내 시누이가 사온 반찬을 보더니 손수 만든 반찬을 보여 주었다.
물론 막내와 우리 것, 막내 시동생네 것 ,어머니네 것 .....우엉 졸임, 멸치 졸임, 튀각 , 총각김치, 열무 얼갈이 물 김치...한 동안 먹을 것이다.
* 음식 솜씨 좋은 큰 시누이 형님이 만든 밑반찬: 멸치,우엉,튀각 ,우리 집 것이다.
* 총각김치, 열무 얼갈이 물김치: 총각김치는 통이 큰 것밖에 없어서 ....^^통안가지고 온다고 어머니께 말씀을 들었다.
매주 시골집에서 김치를 만들어서 보내줬었는데 이번 주는 아주버님 생신이고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시골 집에서 모이기로 해서 모두 들어 가지 않았다.
모두 큰 집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하고 내가 사간 아이스크림 케익으로 초를 켜고
축가를 불러 드렸다. 67세의 생신이었다.
아들만 둘,며느리 둘, 손녀 딸 3명 손주 1명의 다복한 가정이다.
큰 형님 댁 직계 가족이 모두 10명이었다.
7살 손녀 딸 서현이가 할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다.
" 할아버지 생신을 축하 합니다.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해요"
자다가 일어 난 동생 다현이는 미안함과 무한함을 얼굴에 표시하고 있는게 너무 귀여웠다.
시댁에 맡겨 논 아들이 보고 싶어서 금요일 밤에 내려 온 둘째 조카 부부는 아가 중건이를 안고 놓지를 않았다.
조카 며느리는 밥도 아가 때문에 늦게 먹고 ..시댁이니 어려워서 설걷이하는데 도우려고 하였다.
" 그냥 둬. 손에 묻힌 우리가 마저할테니 중건이나 봐"
하고 나와 막내 시누이가 설걷이를 하면 큰 형님이 재빨리 마른 행주로 닦아서 찬장에 넣었다.
며느리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신다.
아이들이 어려서 할 수도 없다.
일도 못하는 나는 마음 좋은 작은 어머니라도 되고 싶었다.^^
정말 화기 애애한 생신 잔치였다.
우리 어머니는 기억력이 갑자기 많이 나빠지셨다.
그 동안은 아무 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아버님은 요양사 자격증을 취득한 시누이 형님에게 주중의 반은 대전에 있고
반은 안산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따님이니까 편하신 것 같다.
일 주일에 한 번 파출부 아주머니가 오셔서 청소와 다리미질을 해주고 가신다.
그리고 아버님은 87세지만 아직 중소기업을 운영하셔서 경제력이 아들들 보다 좋으시다.
어머니 ,당신이 낳은 막내 아들과 막내 딸이 있는데 모두 착하다.
내가 한 사람이 하루 씩 와서 식사를 해드리고 갔으면 좋겠다고 큰 형님과 막내 시누이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이미 그 이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 시댁은 절대 강요를 하지 않는다.모두 자발적이다.
동서 간은 남일까? 자매일까?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에 따라서 시댁 형제들의 우애가 좌우된다.
대전에 5명이 살고 안산에 한 명 미국에 이민 가 있는 시동생이 있다.
3명은 시댁과 아주 가깝게 살고 있고 ,막내 시누이와 나는 자가용으로 30분 거리에 살고 있다.
버스로는 1시간 거리이다. 어머니가 좀 심각한 상태까지 왔으나 입원을 할 정도는 아니니 모두 협력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의 50년 세월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당신의 초등학교 시절에 사범학교에 가려고 노력하던 말씀만 되풀이 하신다.
어머니의 병환은 우리 가족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늘 혼자 방에서 책이나 드라마만 보시는 자존심이 강하고 소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리 되신 것 같다.
치매는 누구에게도 올 수 있는 병이다.
어쩌면 미래의 나를 돌보는 심정이어야 할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기억력만 없으시다.
약을 드시는데 점점 더 해지는 것 같다.
방금 점심을 드시고 ,얼마후 이상하다고 말씀하신다.
" 내가 점심을 먹지도 않았는데 왜 배가 부르지?"
집에 오니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시골 집의 잡초를 혼자 다 기계로 깍았다고 했다.
" 당신! 초등학교 동창들 모이는 것 아니었어?
" 요새 벌초 하느라고 모두 바쁘지 추석이 가까워 오고. 어제 저녁에 모두 갔지. 이근처에 모두 집이 있으니까"
" 아니! 그럼 아버님 모시고 가지 그랬어? 시골 가시는 것 좋아 하시는데"
" 일부러 동창들 모인다고 했어. 아버지 지금 몸이 좋지 않으신데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들 모인다고 했어"
아~ 나는 신발 벗고 쫒아 가도 이 집안의 형제들 효심을 따라 갈 수가 없다.
남편 형제들의 효심에 존경의 마음이 살아 갈수록 생긴다.
무릎이 아픈 어머니를 위해서 의자를 만들어 준 큰 아주버님, ...
8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새 엄마와 살면서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큰 형님 내외 분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우리 가족 전체의 화합을 만들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을 병원에 모시고 가고 두 세 번을 식사 대접을 하고 있다.
다른 날은 나머지 형제가 가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식사는 해서 드실 수 있으니 함께 가서 시간을 보내 드리면 될 것이다.
모두의 어머니시기 때문이다.
효도가 몸에 밴 시고모님들은 조카 사랑도 남다르다.
남편이 내려 놓은 아이스박스 통에 가득 들은 햇김치, 묵은지, 밑반찬을 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 본다.
나는 어떻게 효도를 할 것 인가?
살면서 갚아야 할 숙제이다.
* 홍성 시고모님이 싸서 보낸 반찬들
* 반찬통이 없어서 비닐에 넣고 묵어서 보내셨다.묵은지, 새로한 배추 김치, 풋고추, 및반찬등
누가 시금치의 시자를 보기만해도 싫다고 했을까?
나에게 시댁은 친정보다 따뜻한 사랑의 장소로 기억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 며느리로 올 아가들도 그렇게 생각 하는 여성이 올 것을 기도 할 것이다.
이런 분들을 만난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