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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며느리로 인해서 파티처럼 즐거웠던 설날 아침.

모과 2009. 1. 27. 20:34

큰동서는  남자 형제만 있는 집의 고명딸이었답니다.

교사였던 아버님이 고3 때 담임을 하신 인연이 맏며느리까지 되게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교우 관계도 좋고 공부도 잘했던 학생이었답니다.

형님도 결혼을 할 때는  일을 잘 할 줄 몰랐답니다..

40년의 세월이 형님을 살림의 여왕,살림의 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1978년 결혼을 했을 당시 큰동서는 저보다 7살 위인 34세, 둘째 동서는 4살위인 31세 였습니다.

둘째 동서가 결혼후 큰 수술을 많이 하시고 늘 아파서 집에 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형님 혼자 모든 제사나 생신에 혼자서 일을 하신 것이 습관이 됐습니다.

저와 큰동서는 결혼 전에 엄마가 돌아 가신 점이 같아서인지 일 못하는 저에게 늘 웃으시면서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결혼후에도 맞벌이 하는 저를 위해서 고추장, 된장을 10년 간이나 담궈주었습니다.

큰아들을 낳고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을 구할수가 없자 대전의 큰동서 집에서 6개월을 키워 주었습니다.

얼마나 사랑을 주었는지 큰애는 3살 때까지 큰 엄마가 제일 좋다고 했습니다.

 

시댁은 장수 집안 이라서 시 할아버님이 99세 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 가셨습니다.

평생을 농사를 지으시며 충청도 깡촌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채식을 하시고 ,술, 담배를 하시지 않아서 장수를 하신 듯합니다.

농사지어서 쌀을 판 돈으로 마을의 논,밭을 거의 다 사셨습니다.조금씩,조금씩 사셔서 다 사셨습니다.인근의 야산까지도.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은  고등학교,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직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올해 88세인데 대전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농번기에도 시골에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손주며느리들의 제일 중요한 책임이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는 일년 실패하면 ,다음해에 다시 하면 되지만 자식농사는 실패하면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농사 지은 쌀을 보내주시고 댓가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내가 너희들을 도와준 게 아니니 받을 수 없다]고 하시며 당신의 장례식에 쓸 돈도 미리  저축해 놓으신 분입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8살에 병환으로 돌아 가시고 3년 후 지금의 새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50년이 지났습니다.

남편은 몇 해 전까지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작년에 환갑을 지낸 큰시누이 형님은 아직도 엄마라고 부릅니다.

 

시어머니는 결혼후 바로 발병된 [퇴행성 관절염]으로 지금까지 고생을 하십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우리 형님의 위치가 얼마나 힘든 자리임을 아실 겁니다.

 

평생을 한결 같이 잘하시다 큰집의 반란이랄까 변화가 온 것은 큰형님이 귀와 코 (냄새도 맛도 못 느끼는 병)수술을 7시간이나 하고 난 후입니다.

 

당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못하고 시집을 위해서 살아 오다가 몸에 골병이 들어서 너무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때부터 아주버님이 변하기 시작 했습니다.

기본적인 것은 하시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싫어 하는 눈치가 보였습니다.

평생을 착하게만 살았던 동서는 마음에 병까지 생겼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조금씩 바른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야 좀 살 수가  있으셨을 겁니다.

재 작년에는 허리 디스크가 브러지면서 신경을 건드려서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큰형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의 할 일을 다하시고 두 분이 밤 늦게 시골 집의 목욕탕에서 고무 욕조에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 허리 찜질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큰아주버님이 큰형님을 돌봐야 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너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친척들은 말들은 하지 않았지만 큰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큰집의 둘째가 작년 가을 36세로 결혼을 하고 허니문 베이비를 갖자 두 분이 서로 의논을 하셨답니다.

저도 남편한테 들은 것인데 태어 날 손주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친절하게 잘해주자고 약속을 했답니다.

큰동서가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니까 막내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서 그런다고 하지만 본래 천성이 착하신 분들이라서 그러신 것을 저는 알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 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큰집은 당연히 다 해야하고 맏아들이니까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른 형제들이 접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큰 집이 제일 고생을  하고 우리는 겨우 잠깐 참석만 하는 사람들로서 말조심과 큰집에 대한 감사함을 진심으로 느끼고 말씀도 드려야 합니다.

상대방에 입장에서서 [자기라면 어떻겠는가?]생각해 보고 서로 덕이 되는 말만 하면 좋겠습니다.

부엌이란 공간이 그 집안 여자들만 모여서 함께 음식을 만들고 서로 마음속으로 배려하면서 큰형님은 일을 제일 많이 하셨으니까 우리가 분담해서 전도 부치고 , 그릇도 꺼내고 ,김치도 썰고 ,설걷이 쌓이지 않게 아무나 그때그때 씻고 하다보면 모두 한마음이 되서 일이 힘들지 않고 빨리 진행이 됩니다.

 

제 친정은 이북에서 큰아버지와 아버지만 월남을 했고 큰집은 자녀가 없고 제 부모님은 일찍 돌아 가셨습니다.

명절이면 할아버지댁에 가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시아버님과 친정 아버님은 동갑이십니다.

친정 아버지가 20년전에 돌아 가신후 맏 딸인 나는 친정이 없는 셈입니다.

 

셋 째인 우리만 부산에 28년을 살다 작년 말에 시댁이 있는 대전으로 영구 이사를 왔습니다.

우리는 늘 늦게 왔다가 일찍 갔습니다.

 

이사 오고 맞이 하는 명절에 큰형님에게 전화를 드리니 늘 혼자 열흘 전부터 조금씩 준비를 하신다고 구정 전날 점심먹고 전을 부치면 된다고 했습니다.

구정 전날이 남편의 생일이라서 서울서 내려온 큰애가 점심으로 도가니탕을 사주어서 먹고 목욕을 한 후 큰집으로 갔습니다.

 

근처에 사는 막내 동서와 작은 집 큰동서가 전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산적이나 꼬지, 제수용품등은 큰형님이 두 며느리들과 대충 해놓으셨습니다.

 

큰아주버님과 남편이 밤을 까고 상을 5개 내놓고 닦고 ,큰아주버님이 붓글씨로  지방을 쓰셨습니다. ( 고조할아버지, 고조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먼저 가신 시어머님)).

큰집 조카 둘은 영화관에 갔다고 합니다.

 

설날에는 떡국을 차례상에 놓고 김장 김치도 있고, 형님이 미리 나박 김치와 저녘에 식구들이 먹을 반찬을 준비해 놓으셔서 힘든 일이 없었습니다.

차례를 지낼 때 떡국을 올릴 때는  나물과 생선은 올리지 않는답니다.

며느리 4명 (둘째 형님은 불참) ,조카며느리 2명, 대전 사는 막내 시누이는 큰오빠 집에 선물을 가지고 왔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갔습니다.(16명)

 

저녁은   아주버님이 시골집 에서 가까운 홍성시장에서 사온 조개로 국을 끓이고  주꾸미로 샤브샤브를 하려다 사람이 많아서 그냥 데쳐서 초고추장에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수육과 큰형님이 만드신 어리굴젓과 온갖 전과 (제사용은 미리 만들어 놓은 후) 밑반찬으로 즐겁게 먹었습니다.

 

큰형님은 늘 누룽지도 만들고 어른들의 시중을 드는 라고 식사를 못하십니다.

저도 함께 조수처럼 따라 다닙니다. 종손의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식사를 하지 못하니까,그리고 아이들이 셋이라서 애들 돌보느라고 식사를 못합니다.

 

작년 가을에 결혼한 37세가 되는 둘째 조카의 새아기가 허니문 베이비를 가져서 먼저 밥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큰형님은 당신이 시집을 와서 층층시하에서 힘든 생활을 많이 해서 당신의 며느리는 일을 시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김치와 모든 밑반찬을 만들어서 서울에 사는 조카들에게 보내십니다.

 

나는 조카들이 먹고난 상을 깨끗이 닦고 새음식으로 다시 한 상을 차렸습니다.

큰형님, 나, 종손 며느리 이렇게 셋이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 막내 동서와 막내 시누이가 설걷이를 깨끗하게 다 해 놓았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형님은 자라고 하셨지만 큰형님 집도 직계 가족들만의 시간을 가지시라고 돌아 왔습니다.

구정 날 7시 30분에 늦게 도착을 하니(전날 우리집 부자들간에 대화가 2시까지여서)모두 모여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8시에 차례를 지내고 출근하는 우리 집 막내부터 떡국을 먹이고 도시락을 싸서 보내고 ,

5개의 상에 40명이 넘는 식구들이 식사를 했습니다.

작은집에서는 10명이 왔습니다.

작은 아버님은 허리 디스크 수술 한 것이 재발을 해서 절을 할 때 혼자 서 계셨습니다.

오래간만에 뵙는데  두 분 다 수척해지셨습니다.

 

역시 큰형님, 나, 작은 집 큰동서, 종손 며느리만 나중에 새로 상을 차려서 먹었습니다.

 

그전에는 먹던 곳에 국과 밥을  새로 퍼서  먹었는데 올해 부터 내가 상을 따로, 새 음식으로 깨끗이 차렸습니다.

누구 보다도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 큰형님인데 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나 역시 일은 잘 못해도 열심히 했으니까  늦게 먹어도 잘 차려서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여자들 스스로 자기를 대접을 해야 합니다.

 

세배는 마루와 안방에서 나누어서 받았습니다.

나도 아버님께 세배돈을 만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새배돈을 주었습니다.

어린이는 도서 상품권 5,000원 1장, 중학교 이상은 만원짜리 1장(모두 15만원)을 주었습니다.

아버님께 세배돈 하시라고 10만원드리고 형님에게 5만원을 드렸습니다.

해마다 과일박스를 택배로 보냈는데 올해는 과일 값만큼 드렸습니다.

그 이상을 하면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사는 형편에 비해서 지출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부산에 살 때는 여비와 세배돈이 없어서 명절에 못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큰 아들이 보너스 받은 돈에서 100만원을 주어서 풍족한 명절을 보냈습니다.

연말 정산을 한돈이 150만원이라면서 좀 더 준다고  했습니다.

 

나는 60년 가까이 살면서 마음이 편해 본 적이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58번 째 설날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설날을 보낸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든 고난을 온 가족이 묵묵히, 때로는 전쟁같은 싸움으로 , 그러나 성실하고 독하게 견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시집 식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행복이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성품의  사람들이 나의 가족들임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큰형님, 큰아주버님 같이 좋은 분들이 장남인 것을 하늘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영원한 졸병으로서 큰형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만약 내가 큰동서였다면 [콩가루집안]이 됐을 거라니까 큰 형님이 웃으며

[자네는 리더 쉽이 있어서 잘 할거야.나는 리더 쉽이 없어]하셨습니다.

형님!

형님에게는 솔선수범과 효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형님을 닮아서 집안을 더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데  협조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