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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모과 2009. 1. 4. 12:10

둘째가 딸이기를 그렇게 바랬는데 또 아들이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딸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 이유는 딸의 아기 자기함과 예쁘고 맑게 키우고 싶어서 였다.

 

어릴 때부터 사랑스럽게 키우고 예의 범절을 잘 가르치고 비싼 것은 아니지만 예쁘고 곱게 키우고 싶었다.

딸이 크면 친구같이 함께 다니고 내가 못했던 영어 공부를 잘 시키고 누구나 한번 보면 좋아하는 따뜻한 여성으로 키우고 싶었다.

 

내가 똑똑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어쩡쩡한 사람이면서 자기 실현의 갈등을 많이 했으므로 딸은 똑똑하나 여성적인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얼마나 딸이기를 바랬으면 잘 때마다 예쁜 여자아기의 머리를 빗겨주거나 예쁜 핀을 꽂아 주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아들 많은 시댁의 가풍대로 나는 아들만 둘이다.

아들 둘을 키우며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아들들의 커가는 모습도 신기하고 좋았다. 우리 아이들은 본가의 심성을 닮아서 착하고 조용한 아이들이다.

자라면서 단 한번도 속 상하게 한 기억이 없었다.

 

내가 아들만 있었기 다행이라고 느낀 것은 사업 실패로 알거지가 다 돼다 시피해서 모든 짐을 버리고 13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영구 임대 아파트를 한꺼번에 4,000세대 지어서 분양을 하고 남아서 3순위자도 입주가 가능했었다.

안방에 두 아들의 책상을 넣어 주고 작은 방에 부부가 겨우 둘이 누워자야했다.

작은 아파트라도 살기에는 불편한 점이 없었지만 그 때부터 경제적으로 고단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의 옷은 교복과 체육복이 전부였고 ,등록금은 늘 늦게 내서 담임에게 불려 나갔다.

등록금에는 연체료가 붙지 않고 선납이므로 다른 공과금을 먼저 내고  늘 늦게 내었다.

아들이라서 그런지 내색을 하지 안았다.

오히려  막내 아들은 "선생님에게 등록금 면제 신청을 할까요? "

물었다.

우리 보다 어려운 반  친구가 있으니 늦게 내도 등록금은 엄마가 해준다고 했다.

 

 

소풍 가는 날엔 사복을 입고 가는데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소풍 때마다 옷을 사야 했다.

큰 애는 어릴 때부터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유난히 자존심이 강했다.

고1 소풍 때 10만원을 주었더니 친구와 함께 부산 터미널에 있던 부산 백화점에서 세일을 하는 바지와 티셔츠를 사고 남은 돈을 주었다..

매우 미안해 하는 아들에게 어리석은 엄마는 야단을 했다.

큰애는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미안하다며 바꿔 오겠다고 했다.

내 마음도 아파오며 아들애한테 미안 했다.

어릴 적에도 큰시누이 아들의 옷을 물려 입어서 옷은 좋으나 제 옷으로 산게 별로 없었다.

그 때 바꾸러 가는 아이에게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마음 아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딸이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웬지 아들은 그렇게 키워도 괜찮은데 딸아이에게 등록금을 늦게주고 ,옷도 제 때 사주지 못하면서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비싼 옷은 아니더라고 고운 옷을 여러 벌 사주고 싶고 어느 곳에 놔두어도 주눅들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대학 시절에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 환경으로 인해서 4년을 계속 가정교사를 했고 번돈을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던 것이 무척 갑갑했던 기억 때문일 수 도 있다.

70년대라도 내 대학 동창들의 집들은 대부분 부유했고 ,지방 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더 부유한 집의 딸들이었다.

그당시에도 꽃꽂이나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친구들도 많았다.

 

대학 졸업 후에도 4년의 교사 생활의 봉급을 어머니에게 모두 드리고 용돈만을 받아서 썼고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 가신후 2년 후 빈몸으로 결혼을 했다.

 

나는 딸에게 나처럼 고단한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을 실패하고 두번이나 집에 압류로 나왔을 때마다 딸이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아들들에게도 학기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고 공부만 하게 했다.  우리 때에는 없었던 학자금 대출도 되니까.

 

어제 막내 아들이 쉬는 날이라서 그런 말을 했더니 웃으며

"딸은 돈이 더 들지 않아요?" 했다.

"그렇지. 구두도 몇 켤레 사주고 백도 그렇고, 옷도 단벌로 다니면 엄마 마음이 참 아팠을 거야"

 

막내 아들이 초등학교 일학년때 내가 오른쪽 폐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했다.

그 후 3년은 몸이 자주 피곤했다.

큰아이에 비해서 기초를 돌봐주지 못해서 지금 까지 영향이 있는 것같아서 미안하다.

아르바이트를 덜 시키고 일년만 어학연수를 시켰어도 덜 미안 할 텐데 29이 되서야 대학을 졸업하는 아들에게 미안하다.

늘 아기인줄 알고 있는데 어느새 30이 다 됐다.

 

다행히 고향인 도시에서 함께 살게 돼서 결혼 후에도 내가 도움을 줄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다.

좋은 할머니가 돼서 손주를 돌봐 줄 것이다. 기까운데서 살면서.

 

그렇게 낳고 싶었던 딸을 못 낳았지만 아들들이 결혼을 하면 손녀 딸을 먼저 낳았으면 좋겠다.

 

온가족이 사랑으로 곱고 착하고 마음이 따뜻한 여성으로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이제 막내 아들도 취직이 되고 모은 돈은 없지만 평화롭게 살면서 남은 빚을 갚아가면 된다.

 

자식이란 부모에게 인생의 가장 큰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두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평화롭게 살면서 가끔 우리와 함께 식사도 하고 가까운 곳에 여행도 다니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내가 딸이면서 며느리면서 ,친정부모님은 일찍 돌아 가셔서 찾아 뵙지 못하고 아이들에겐 외가가 없고 ,시부모님들에겐 우리만 멀리 살고 어렵게 살아서 효도는 커녕 시댁의 도움만 받고 살았다.

 

나의 아들들도 직장이 바빠서 ,우리를 자주 못 찾아 와도 이해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결혼 후 남편과  두아들과 사는데 급해서 부모님을 잊고 산 적이 더 많았다.

내 아들과 며느리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아들과 딸에 대한 편견은 원래 없다.

내 개인적인 삶의 흔적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