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앓이...부산에서의 28년을 마감하며
부산에서의 생활도 보름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서울에서 살 때 친정아버지의 질서 없는 인생이 자식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결혼을 했어도 늘 친정 일로 마음이 아파야 했다.
어머니가 45세의 나이로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 가시고 그후 15년을 혼자 사시며 여자 문제로 큰 딸인 내게 큰 상처를 주었다.
마음은 착하시나 평생을 생활력이 약했던 아버지.
그러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어느 아버지 못지 않았다.
노후를 초라하고 쓸쓸하게 보내신 아버지의 외로움을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다.
불성실한 일생을 살아 온 아버지에 대한 효도가 얼마나 어려운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늘 친정에서 벗어 나고 싶었다.
친정 동생들도 여동생을 빼고는 다 결혼을 했거나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서 나의 존재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현실 도피였을 것이다.
막연히 친정과 멀리떨어진 [부산]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1981년 12월 백일도 안된 막내를 업고 해운대 언덕의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후 대연동, 문현동, 신만덕, 구포,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변두리 끝동네에서의 15년...어느새 28년이 지났다.
남편의 고향도 내 고향도 아니여서 마음 속으로는 늘 떠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남편에게 부산은 가족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본인도 하는 일마다 실패를 경험한 상처가 많은 도시이다.
15년 전부터 한시라도 부산을 떠나고 싶다고 자주 말해 왔었다.
나 또한 부산을 떠나면 속이 시원하고 섭섭 할 것이 없을 줄 알았다.
몇 년 전부터 남편의 고향인 대전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막내도 대전의 국립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번에도 갑작스런 변화가 왔다.
남편이 먼저 입사한 중소기업형 서점인 마트안의 대형서점이 대전에 갑자기 오픈을 하게됐다.
이미 발령을 받고 남편은 추석 전부터 대전의 시댁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나는 근무하는 서점의 후임자에게 인수 인계도 해야 하므로 두 달 늦게 발령을 받았다.
부산을 떠나는 게 소원이었던 우리 가족들이었다.
부산에서 너무 큰 실패와 상처를 받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상처가 깊었으면 남편은 20년전에 산 낡은 장롱과 서랍장, 문갑, 오래된 이불들을 모두 버리고 오라고 한다.
결혼 후 20번 째의 이사를 하는데 살 때는 새로 산 집에 맞춰서 메이커 가구를 세트로 들였었는데 이사 다니는 동안에 여기저기 찍혀서 돈을 주고 버려야 할 지경이 됐다.
새로 이사 갈집은 투 룸으로 직장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다고 한다.
막내와 남편이 보고 결정한 집이다.
나에게 대전은 역시 타향이다.
그러나 30년을 한결같이 내게 사랑을 준 시댁어른들이 살고 있는 정겨운 도시이다.
부산을 떠나면 좋을 것 같았던 나의마음이 요즘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두 아들을 잘 크게 해준 고마운 도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살기좋고 싱싱한 생선을 싼 값에 흔하게 살 수 있는 도시.
이제는 서울보다 대전보다 익숙해서 오히려 서울말과 충청도말이 낯설게 돼버린 부산에서의 28년의 변화무쌍한 생활.
30살의 새색시로 이사를 와서 57세의 할매가 돼서 부산을 떠나게 됐다.
특히 부산의 끝동네 화명,금곡 신도시에서 자란 두 아들이 학군 좋다는 곳에서 자라지 않은 것이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아이들 인생의 선물이었던 것같다.
어려운 우리보다 더 어려운 친구들도 많다는 것을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친구가 되면서 세상을 알게 되었다.
두 아이들이 남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해준 부산의 정많고 화끈하고 단결심있는 정서에 감사를 드린다.
사느라고 바빠서 ,아니 융통성 없이 고지식하고 성실하기만 성격때문에 부산에 살면서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이제 부산을 떠나면 언제 또 오겠는가?
대전으로 가기전에 못 가본 곳을 ,그리고 부산의 명소를 다시 한번 가보고 떠나고 싶다.
부산의 사투리가 경북의 사투리보다 투박한 것도 정이 많아서 임을 깨달았다.
부산의 지하철 1,2,3호선을 매일 환승하며 [사직운동장]역을 지날 때면 롯데 구단의 강민호 선수의 멘트가 나온다.
[다음 역은 롯데자이언트의 홈구장인 사직 구장 입니다. 저는 롯데자이언트의 강민호선수입니다. 부산 갈매기를 외치며 한목소리로 응원해주십시요. 감사합니다]
부산만의 지하철 풍경일 것이다.
부산은 이제 내게 도시가 아니라 친구이며, 내가 살던 동네에서 12년간 [책대여점]을 이용해 준 수 많은 학생들은 내 인생의 중요한 멘토들이다.
보수적이고 고집쎘던 나를 젊은 이들의 문화 속으로 걸어가도록 이끌어 준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부산에서의 28년이 있었기에 나는가족들에게 대접받는 엄마와 아내가 될 수 있었다.
섬처럼 고립 되었던 내게 사랑으로 포근하게 감싸주었던 부산과 부산 사람들에게감사를 드린다.
**부산에 살면서 못 가본 곳과 다시 가볼 곳
부산 용궁사 는 기장의 바닷가 돌산에 위치해 있다.
28년을 살았어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내가 융통성이 없고 게을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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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해수욕장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너무 멀어서 가볼 일이 없었다.
- 해운대가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서 2년을 살았다.
- 지하철 [장산행]을 타고 해운대 해수욕장과 해운대 신시가지를 가봐야겠다.
- 해운대의 목욕탕은 모두 온천이다.
- 부산태종대 고2 때(1968년) 수학 여행을 와서 영도의 태종대를 들어 설 때 왼쪽의 바닷속의 대학 [해양 대학교]와 바다의 경관에 반해서 우리 반 학생들이 바닷 쪽으로 소리를 지르며 몰리는 바람에 버스가 기웃뚱했다.
- 용두산 공원 의 비들기 떼들과 할아버지들의 쉼터.
- 서울의 [파고다 공원]같이 용두산 공원은 어느새 할아버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됐다.
- 남포동이 제일 번화가 였는데 이젠 [서면]이 제일 번화가가 된 것같다.
젊은 이들이 모이는 장소
부산대앞(부대앞), 경성대앞, 서면, 덕천동 번화가, 사상 시외버스 터미널주변, 하단 동아대 승학 캠퍼스주변,
어른들은 광복동, 더 나이드신분들은 [온천장역]주변 허심청, 녹천탕,동래산성, 해운대 온천등....이다.
부산은 네게 제2의 고향으로 마음속에 자리잡혀 있다.
결혼 생활 30년중 28년을 살았던 부산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부산에서의 마음 아팠던 기억들은 해운대 앞 바다에 떠내 버리고 갈 것이다.
대전에서의 새 출발은 내 인생의 네 번째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행복의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