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세상에서 단 한명의 소중한 친구

모과 2008. 10. 27. 22:07

사람이 앞 날을 미리 알면 인생은 훨씬 재미가 없을 것이다.

 결혼 한  2년 후 부터 부산에서 28년을 살 줄 알았다면 내가 부산[해운대]로 신혼 여행을 왔을까?

그것도 해운대 앞 바다가 다 보이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대마도]까지 보인다는 달맞이 고개가 있는  그 [해운대  A I D아파트]에서 살 줄 알았다면 제주도로 정해졌던 신혼 여행을 굳이 바꿔서 부산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파트는 지금 재개발 작업이 한창이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1981년 1월에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2008년 11월 중순경에 [부산]을 떠나게 됐다.

만으로 28년을 부산에 살면서 마음 속으로는 [언젠가는 떠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남편이 충청도 사람이라서 부산에서 만나는 친척들도 모두 충청도 사람들이었다.

 

모든 친척이 대전, 충남에 모여 사는 대가족이 나의 시댁이다.

집안의 경조 대소사에 우리만 가면 된다.

 

친척들이 워낙 많아서 부산 우리집에서 모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친구들이 모두 서울에 있다.

 

매일 만났고 전화를 했던 친구들과 서서히 소식이 끓어지게  됐다.

직장을 그만 두고 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했던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1994년부터 12년을 부산의 끝동네에서 초,중등학생들을 상대로 [책대여점]을 했었다.

아침 11시 30분부터 밤 12시 30분까지 ,일요일만  오후 12시부터 6시까지 알바생을 쓰고 혼자서 책방을 지켰다.

12년 동안 단 6일 (그것도 마지막 명절 3 번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어리석을 정도의 미련함이 크지만 생활이 너무 절박해서 생각을 넓게 할수가 없었다.

 

그 때 나의 유일한 친구는 나의 한 살 아래 여동생 이었다.

12년동안 내가 입은 모든 옷을 사서 소포로 부쳐 주었다.

숙녀복 양품점을 잠시했던 동생은 좋은 옷을 싸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백화점 식품부에서 10여년을 일을 해오던 동생은 [명란젓][창란젓][오이지]등을 랩으로 수십번 싸서 소포로 보내주었다.

심지어 팬티와 브래지어,화장품도 보내주었다.

 

큰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됐을때 크게 기뻐하며 단칸 지하방에 매주 불러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푹 재워 보냈다.

 

여동생은 내가 우연히 본 신문기사 의 광고를 알려주어서 18평 임대아파트(5년후 분양) 로 이사를 가게 됐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큰아들은 군에서 제대 후에는 학교 기숙사에 졸업 할 때까지 있었다.

시설은 좋으나 4인 1실 이어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매주 이모 집에 가서 정말 소중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이모의 월급날이면 서울의 맛집을 다니며 대접을 받았다.

여동생은 첫번 째 연애를 실패 한후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친정의 부모님들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32년전에 아버지는 20년전에 ...뭐가 그리 급하신지 많은 책임을 남겨두고 가셨다.

친척이라고는 [수의사]를 하시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뿐이었다.

두 분에게는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여동생이 다섯 살 때 우리 집에 오신 큰아버지를 따라 가서 5년을 살다가  다시 돌아 왔다, 다시 큰집에 갔다를 반복했었다.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큰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여동생의 사춘기는 [정체성의 혼란]을 심하게 겪었었다.

 

 그러나 ,마음이 여리고 착한 여동생은 매주 쉬는 날이면 반찬을 사가지고 큰 집을 찾아 갔다. 20년을 한결같이......

큰어머니는 여의도의 큰 교회만이 교회로 인정을 하셨고 ,그교회를 다녀야만 도움을 준다고 했었다.

그 교회의 장로가 하는 회사에 수억을 빌려주었다가 떼였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늘 교회때문에 싸우셨다.

큰어머니가 큰아버지 몰래 돈을 숨겼다가 헌금을 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불행한 죽음을 당했으나 수십년을 다니던 교회의 예배 한번 받아보지 못하시고 화장장에서 재로 변하셨다.

큰아버지가 교회에서 보낸 화환에서 목사님의 이름을 가위로 잘라 버리셨기 때문이었다.

 국가 유공자인 큰아버지가 돌아 가시면 국립묘지에 함께 안치하기위해서 임시 납골당에  모셨다.

 

2년전 갑자기 큰어머니의 사고사로 큰아버지는 [가축병원]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직업군인 시절에 귀의 고막을 다쳐서 남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으셨다.

큰어머니가 간호사겸,통역겸 함께 일을 하셨는데 그만 일을 당한 것이다.

 

큰아버지는 장례식을 마치자 마자 여동생을 양녀로 입적시키겠다고 했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무료 법률사무소]에 가서 절차를 알아서 양녀로 입적하게 해주었다.

여동생은 외모도 큰아버지와 아주 닮았다.

임대아파트 입주금 잔액,  6,000만원도 큰아버지가 일시불로 해주셨다.

신당동의 34평 아파트, 역세권 상가아파트에 42평상가, 예산에 1,500평 땅, 살고 있는 집도 올라서 2억 가까이 됐다.

 

재개발이 결정된 신당동 아파트를 팔고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34평을 사서 어제 이사를 갔다.

[언니!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살던 아파트를 전세 계약을 했다고 전화를 했다.

 

내년이면 89세가 되는 큰아버지는 얼굴에 평화가 감돌고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동생집에 오시기 전에 제일 맛있게 드신 음식이 [김밥나라]의 [오무라이스]라니.....

그날 번 돈은 그대로 길 건너편의 은행에 저금을 하셨다.

아침에 일어 나시면 라면 두개와 계란 두개로 식사를 하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우리가 가면 차비를 줄 돈이 없으니 오지 말라시던 큰 어머니....

 

솜씨 좋은 여동생은 지극 정성으로 매일 매뉴를 바꿔 가며 큰 아버지를 극진히 대접을 하고 있다.

 

 

하루에 심하면 10번의 전화를 하던 동생,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유일하게 비밀이 없는 친구 .

 

[착한 끝은 있다]는

말을 나는 보고 있다.

여동생 덕에 큰 아들은 8학기중에 7학기의 장학금을 받고 졸업을 했고 ,지금 적성에 맞는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노력도 하며 잘 다니고 있다.

 

어릴 때 나는 동생의 뛰어난 미모 때문에 외모에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었다.

동생은 공부를 좀 하는 언니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고 살았다.

 

그러나 이제 57,56세의 우리는 이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자매인 것이다.

 

*동생이 큰 집으로 이사를 가서 올 설날에는 친정에 가야 겠다.

물론 시댁의 허락을 받고.

의사가 큰아버지 연세가 많으시고 몸이 불편 하시니 늘 각오를 하고 살라고 했다.

평생을 쓸쓸한 명절을 지내셨는데 올 해부터는 좀 북적이는 명절을 보내셔야 할  것 같다.

 

나도 친정에 가까운 대전으로 이사를 가니 그 동안 못했던 며느리 역할도 충실히 하고 친정에도 자주 가고 할 예정이다.

 

***이글은 큰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쓴 것이며 큰 어머니의 [타살]은 꼭 글로 세상에 알려 주기를 바랍니다.

단편소설로 한번 잘 써 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