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와 명품 지갑
직장 숙소 동료들과 대만으로 여행을 간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선물로 향수와 지갑을 샀어요."
"야야! 그만 둬라 . 엄마가 향수는 무슨....지갑도 아직 괜찮은데...."
'엄마 지갑이 너무 낡었어요. 향수는 은은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지갑은 좋은 것을 써야지요. 명품으로 샀어요."
" 엄마가 그런거 하면 사람들이 흉본다. 다른 것은 안 그런데 지갑만 좋은 것이면 웃기잖아. 엄마가 살도 빼고 멋있어지면 그 때 사주지."
"(말없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지갑이 참 예뻐요. 다음에 다른 것도 좋은 것으로 사드릴께요"
잘랄 때부터 유독 미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아들이다.
3살때 동생이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할 일이 있어서 서울 이모집에 보냈었다.
이모 경대위에 있는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을 보고 예쁘다며
"이모! 이 꽃 엄마한테 갖다 드리면 안되요?"하더니 이모가 한 립스틱도 이쁘다고 달래서
양손에 꽃과 립스틱을 들고 [구포역]으로 마중 나간 나에게 주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가끔씩 떠오른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엄마 친구가 한 립스틱 색깔이 예쁘다고 엄마도 사서 하라던 아들이었다.
서울로 유학을 가서 내 생일 선물로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를 만들어 주고는 일촌으로 아들의 미니홈피의 파도를 타고 아들이 만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라고 했었다.
아들의 대학교 졸업식날 아들과 인사하는 학생들이 모두 낯이 익었다.
대학 생활 내내 주말이면 혼자 살고 있는 이모집에 가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푹 쉬고 ,여동생은 월급날이면 서울의 맛집을 다니며 조카인 큰 아들에게 사먹였다.
회사에 취직이 되고 올 초 구정 때 회사에서 나온 100만원 상당의 고가인 [그릇세트]를
요리를 잘하고 관심도 많은 이모에게 드리겠다고 전화가 왔었다.
"다음에 또 선물 나오면 엄마 드릴께요"하는 데 하나도 섭섭하지 않고 대견했다.
[그릇 세트]를 받자마자 이모의 고마움에 보답하려고 엄마보다 이모를 생각해 준게 고마웠다.
이모와 함께 갔던 천호동의 먹자 골목의 보쌈집을 아버지나 나나, 동생이 가면 데리고 가서 사주는 아들.
신입 사원 2년차인데 벌써 집을 위해서 너무 많은 돈을 썼다.
사업 실패의 후유증으로 두번이나 집이 압류되서 나오게 됐는데 두 번 째에는 큰아들이 신용대출을 해서 월세의 보증금을 해주었다.
더이상 견디기 힘든 아빠의 틀니를 500만원이나 들여서 새로 해주었다.
동생 등록금도 한번 해주고 , 동생을 만나면 꼭 못 먹어 본 고급 음식을 사준다.
아버지와 엄마가 열심히 살았어도 실패한 것을 이해하고 묵묵히 성실히 일해서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아들.
지난 여름에는 회사의 [포상휴가]로 발리로 일주일간 갔다 왔다.
휴가 첫 날 전화가 왔는데
"엄마! 여기는 지상 낙원이야. 엄마 아빠 꼭 모시고 다시 올거예요"
술을 많이 하지않고 담배도 피지 않는 아들은 주말이면 이모집에 가서 푹 쉬고 온다.
대학 시절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못했고 ,취업시 엄청 스트레스를 받었었다.
경영, 영문을 다전공해서 토익점수는 괜찮았으나 회화가 안되서 였다.
우선 동남아 부터 [황금연휴]에는 다녀 오기 시작했다.
홍콩, 일본, 상해, 대만, 그리고 보너스로 발리 , 대학시절 작은 아빠가 있는 미국의 유타주의 깡촌에서의 한 달.
담배를 피지않고 술을 줄이면 다녀 올 수 있는 금액이다.
적극적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다음에 여행 할 것을 생각하면 일이 더 즐겁다고 했다.
[비욘세콘서트],[엄정화 콘서트] ....스트레스를 풀기위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권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과 부산, 대전에 흩어져 있는 우리는 개봉 되는 영화를 보고 전화로 서로 권하고 영화내용을 대화로 시작하면서 교류한다. 친구처럼.
두 달이 지나면 58세가 되는 엄마에게 체중감량을 하면 [멋장이]로 만들어 준다는 큰 아들.
자기가 취직 되면 용돈 넉넉히 드릴테니 쉬라는 막내 아들.
계속 되는 남편의 사업 실패가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우리 가족을 단단하게 결속 시키는 역할을 한 것 같다.
부모라고 부족함이 왜 없겠는가?
두 아들들에게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상처를 많이 준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한결같이 살아 온 것을 지켜 본 아이들이 [가족]은 행복 할 때보다 힘들때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고맙다.
특히 강남의 부잣집의 잘 생긴 학생들 속에서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장학금을 꼭 타야하기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아려 온다.
혹자는 아들들이 엄마에게 잘하면 [마마보이]라고들 말한다.
군대를 잘 다녀 온 남자들은 마마보이가 아니고 엄마의 보호자로 거듭나서 돌아 온다.
그리고 효자는 유전과 같다.
시아버님이 시할아버님께 하는 효도를 남편이 지켜 봤고,
남편이 시아버님께하는 효도를 우리 아들들이 지켜 본게 가장 큰 재산이다.
남편과 나는 부모의 도움 없이 빈몸으로 결혼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 30년을 보내며 파경을 할 번 했던 우여 곡절을 다 극복하고, 사업 실패를 딛고 , 남편은 4년전에 입사했던 직장에서 인정을 받았고 고향인 대전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고향으로 갔다.
부산에서의 28년은 아픔이 더 많았던 곳이지만 두 아들을 키워준 고마운 도시이다.
한달 남은 부산 생활, 만감이 교차하는 착찹한 심정이지만 좋은 것, 나쁜 것 모두 부산에 묻어 두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
딸을 그렇게 낳고 싶었지만 못 낳았고, 키워 보지 못했으니 이제는 부럽지도 않다.
아들들이 늘 내게 잔잔한 행복을 주며, 가끔씩은 미소 지을 수 있는 말을 진심으로 해주기 때문이다.
앞으로 며느리를 본다면?
딸같이 생각한다는 말 같은 가식적인 말은 하지 않겠다.
서로 예의를 지키며 대우 해주다가 세월이 흐르면 좋은 친구같이 가까운 사이가 되길 바랄 뿐이다.
내가 시댁 어른들을 고마워하고 자랑으로 생각 하는 것처럼 우리 집에 올 새아기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나도 아들 자랑 해 봤습니다.
우리 아들 저축도 많이 합니다.
월급 많이 주고 일도 많이 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