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생활 29년. 이제 서울로 돌아 가고 싶다.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살다보니, 시간도 잘 가고 잠도 잘 와서 좋은데 뭘 하나 빠트리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루 종일 시끄럽게 들리는 마트의 음악 속에서 더 억세고 시끄러운 경상도 아지매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곳이 타향이구나!
너무 오래 이곳에 살았구나!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고향, 친구, 추억, 무엇 보다 나를 돌아 보게 되었다.
부산에 와서 29년 째.
늘 그렇듯 혼자일 때가 많았고 ,내가 책 다음으로 좋아 하는 어린이와 중, 고등학생들과 12년을 살아서
경상도 아줌마들의 억센 음성과 투박함을 잊고 살았다.
친절을 가장한 미소와 아예 무표정인 젊은 여성직원들의 투박함과 기본 적인 인사도 할 줄 모르는 태도에서 늘 그러러니 하다가도 ,30살도 채 안된 저 아이들의 머리 속에는 뭐가 들었기에 이곳에서 저러고 일을 하고 있나?
딱하게도 보이고도 한다.
마트에서 일을 하는 여직원들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내부 고객(임대 업체 직원) 에게 불친절한 사람들이 많다.
자주 마주쳐도 인사조차 안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부산은 아름다운 바다와 유명 사찰과(통도사, 범어사, 내원사, 병풍사, 석남사) , 온천과(해운대 온천, 동래온천) 산성과 사람 살기 너무 좋은 곳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왜 그리 투박하고 거칠고 시끄러울까?
나는 29년 동안 느끼지 못한 그 것을 이제 자꾸 느끼며 조금씩 견디기가 힘이 들어 진다.
이곳에서 아들들을 키우고, 행복한 시절도, 여자로서 참혹하고 불행한 시절도 다 보냈다.
나는 그동안 부산에서 살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런데 형벌에 가까운 시절을 견디면서 이곳이 부산인지, 서울인지, 대전인지 의식을 못하고 두 아들을 끌어 안고 앞만 보고 힘들게 걸어 왔다.
이제 좀 안정이 되기 시작하고 겨우 나를 돌아 보니 내가 멀리 떠나온 여행에 지친 몸으로 겨우 서 있다.
나를 잊고 살아 온 세월 속에서 걸어 나와서 주위를 살펴 보니 이곳이 너무 낯 설다.
내가 자란 서울의 거리들.....청구 초등학교, 진명여자 중학교, 굴레방 다리의 중앙여자 고등학교....그리고 기차가 다니던 이화교를 건너서 달려가 대강당 많은 계단을 오르던 대학교.
중학교에서 가정 숙제로 내주었던 수예 용품을 사러 갔던 안국동 로타리에 있던 [꿀빵 쎈터] ,지금 생각하면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여학생만이 출입이 가능한 빵집이었다.
북아현동 에 있던 고등학교 에 입학식을 한 다음 날 지각을 해서 교감 선생님과 학교 운동장을 30바퀴나
뛰고 시작했던 고등학교 생활.
배구명문 여고에서 덕성이나 숭의여고와의 결승전이 있는 날에는 단체로 장충체육관으로 가서 응원을
했었다.
그 당시에 김추자 보다 더 춤을 잘 추던 응원 단 학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까?
운동에 별 흥미가 없었던 나는 모두가 열광하는 장충 체육관 한 자리에서 조용한 섬처럼 고독을 느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올림픽 경기가 있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렇다.
모든 사람이 운동을 좋아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나는 운동보다는 독서를 좋아하고, 뒷담화보다는 정직한 토론 내지는 대화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한 후 전 우주 속에서 혼자라는 고독함을 느낀 후에 나는 늘 혼자 였다.
서울대학교 영문과 출신의 노총각 담인 선생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겨우 낙제를 면하고 2학년으로 진학을 했다.
선생님은 몸이 아파서 기말고사를 치지못한 나를 위해 17과목 선생님께 간청을 하시고 점수를 구걸하다시피 해서 나를 2학년에 진학 시키셨다.
이 학교는 실제로 한 학급을 낙제시키는 학교였다.
선생님과 2학년부터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약속을 했고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대학에 입학 한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우연히 고 1때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입학한 학교가 최고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때가 대학 입학후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었다.
고 1때 문학에 심취해서 공부는 아예 멀리 던져 놓고 국,내외 문학을 섭렵했다.
나는 이시기에 공부를 하지않고 수 많은 책들을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맙게도 내가 다닌 중앙여고는 도서관이 개괄식이었다.
선생님과의 약속대로 나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 거의 꼴찌 수준에서 2학년에 올라 갔으나 졸업 후엔
그 당시에도 가기 힘들 었던 이화 여대에 진학을 했다.
대학을 졸업을 하고 교사가 됐을 때 우리반에는 문제아가 없었다.
공부 하기 싫은 심정을 이해하니까 대화를 하면 어떤 문제아도 고쳐 줄 수가 있었다.
대학 4년동안 계속 되었던 가정교사.....그당시에도 내가 다닌 대학교는 부잣집 딸들이 많았다.
집이 기울어서 가정교사를 계속했던 그 시절이 갑갑하게 느껴오고 있다.
유난히 시끄럽던 경상도에서 유학을 온 아이들의 사투리.
부산 사람들은 뒷끝이 없다고 자랑을 하나 자기들만 뒤 끝이 없으면 다 인가?
듣는 사람은 상처로 남는데....
여자들은 대부분 내지르듯 퉁명하게 말을 한다.
이것은 단지 기질의 차이 일 것이다.
내가 부산에 와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서울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다.
칭찬이 아니다.
그만큼 서울 여자에 대한 인식이 나쁜 것이다.
친정만 알고 자기 식구만을 간수하며 시집 식구를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부산에서 만난 서울 여자들은 알고 보면 거의 다 경기도 신도시나 시골 에서 살다 온 여자 들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늘 흑백논리, 일등을 꼭 따지는게 문제인 것같다.
다 같이 좋을 수도 있고, 공동 일등도 있는데 꼭 승패를 따져야 한다.
나는 친정부모님이 다 일찍 돌아 가셨고 남편은 충청도 대가족의 한 사람이다.
우리 시댁이라고 갈등이 없을 리가 없다.
다른 집에 비해서 비교적 인성과 배려와 양보와 정이 많다.
그래서 사소한 갈등을 덮을 수가 있고 ,무엇보다도 남편이 자주 시댁에 가고 싶어 한다.
나는 나를 배려해 주고 사랑해 주고 인정해주어서 시댁 어른 들이 좋다.
사람사이에 정을 주는 법과 배려하는 법과 양보하는 법을 시댁어른 들의 모습에서 배웠다.
모두 충남, 대전에 모여 살고 있는데 우리만 부산에서 29년.
이제 아들들도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막내는 계획적으로 대전의 대학으로 보냈다.
너무 외롭게 부산에서 우리만 살아 온 것이다.
이것은 동물적인 귀소 본능에 가까우며 ,30년 가까이 살았어도 타향은 타향인 것이다.
남편이 여러 번의 실패로 친구들과 스스로 멀어졌고, 나또한 친구들과 멀어졌다.
이제 대가족인 시댁이 있음에 감사함을 진하게 느낀다.
남편과 30년을 살아 오면서 증오가 사랑보다 강할때도 겪었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사랑했음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
결혼 후 한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남편의 말을 이제는 진실로 받아 들이게 됐다.
부산 생활을 오래 했으니 결혼 생활의 모든 추억이 부산에 있다.
해운대, 문현동, 대연동, 만덕, 그리고 화명동 신시가지.그리고 양산과 경계선의 부산의 끝동네에서 15년 째 살고 있다. 금정산 줄기 끝에서.
부산 생활 30년을 채우고 남편이 그렇게 원하는 남편의 고향 근처로 가고 싶다.
부산을 떠나게 되면 부산은 또 하나의 고향으로 나와 우리 가족의 마음 속에 자리 할 것이다.
**부산 아지매들 엄청 억세고 ,생활력 강하나, 말씨는 쪼매 조용하고 친절했으면 좋겠다.
버스 속에서나 지하철 에서나 시끄러운 것은 모두 여학생 아니면 아지매들이다.
왜 악을 쓰며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다른 도시에서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작년에 겨우 회에서 비릿냄새가 나지 않고 맛이 있어 졌는데 ....요즘 들어 부쩍 부산 사투리가 귀에 거슬리며 ,친구들이 그립고 서울이 그리울 때가 많다.
30년이 다 되서 가끔 전화나 주고 받았던 절친한 친구들을 만난들 할말도 그리 없지만 그냥 돌아 가고 싶다. 그냥.
익숙한 거리에서, 익숙한 말들 속에서 살고 싶다.
**마치 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 역이민을 간절히 원하는 심정 같은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