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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째 아버님과 형제들이 고친 7대가 살아 온 충청도 깡촌 시골집입니다

모과 2008. 6. 22. 19:10

집앞으로 나 있는 길, 꼬불꼬불 나가면 마을 입구에 [수덕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75세인 시고모님 부터 이 학교 졸업 생입니다. 막내 고모님과 큰 아주버님이 초등 학교 동기 동창입니다.^^

배고파서 집으로 두 분이 그냥 온 적도 있답니다. 막내 고모님이 67세, 아주버님이 66세입니다.

  사랑 방에서 내다 본 큰 길로 나가는 길입니다.밭은 아버님 밭입니다. 외나리의 모든 길은 박씨 문중에서 만들었다고 [보건지소장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큰 시누이님이 강남콩을 심어서 사이좋게 나눠 먹었습니다.

  집에서  바로 보이는 앞산은 그냥 야산이고  멀리 보이는 산이 [월산]입니다.

집 뒤로 야간과 소나무 숲이 병풍 처럼 빙 둘러쳐 있습니다.

아버님 친구 분들이 오셔서 집터가 아주 명당이라고 하셨답니다.

시골집에서 차로 5분 가면 [수덕사], 10분 가면 [덕산 온천],50분 가면 [가덕도]의 꽃지 해수욕장입니다.

그래서 마을 입구의 학교가 [수덕초등학교]입니다.

남편도 수덕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산 중학교에 수석 입학 했습니다.

6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시댁 작은 아버님이 십니다.^^

스승의 날이면 선물을 달라고 하셔서 모두 폭소를 터트린 적이 있습니다.

큰 동서 형님은 아버님이 고 3 때 담임을 하셨습니다.

둘째 형님은 수덕사 주지 스님이신 법성 스님이 중매를 하셨습니다.

시할머님이 수덕사에 정성을 들여서 감동한 여스님들이 할아 버지, 할머니 장례식때 2박 3일간을 3교대로 불경을 읽어 주시며 밤을 새시고, 장례식은 법성 스님이 직접 인도 하셨습니다.

시할아버님때도 그렇고 49제도 모두 법성 스님께서 주관 하셨습니다.

종교가 다른 우리 대가족은 모두 돌아 가신 분의 종교대로 장례식을 해 드렸습니다.

 이 동네는 유난히 소나무와 까치가 많습니다.

시골 집 주변에도 소나무숲이 방풍림처럼 동네 주변을 빙 둘러서 있습니다.

시골 집 담장을 제주도 돌담처럼 쌓고  담 주변에 연산홍 2,000그루를 심으셨습니다.

 시골 집 사당 입니다. 어머니는 강당이라고 부르십니다.

15평으로 위폐는 없습니다.

모두 [수덕사]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미송이라는 향내 나는 나무로 벽을 치장해서 가족이 회의실 같이 모일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아버님은 이 집에서 태어 나셨고,  시고모님  다섯 분과 작은 아버님과    아주버님과 남편의 칠 형제가 태어 난 집입니다.

담안 의 대지 평수가 600평이 라고 합니다.

  뒷곁에 장독대입니다. 돌담과 장독대가 보이시지요? 연산홍 꽃도 아직 지지 않은 것이 보입니다.

처음에 1,000그루 심었는데 주말에만 가니까 잡초가 무성해서 올해 아버님이 연산홍 1,000그루와 소나무 20그루를 더 심으셨습니다.

모두 아버님 돈으로 고쳤습니다.

이집에서 멀리 (걸어서 한 시간) 홍성 까지 초등학교를  다니시고 서울 배재 학당에 유학을 가셔서 연희전문 학교 상과를 졸업 하셨습니다.그후 교육계에 계시며 국가에서 훈장을 두 개나 받으셨습니다.

대전의 명문 고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퇴임 하시고 조그만 중소 기업을 아직도 경영하십니다.

아버님은 현재 87세이시며 시댁은 장수 집안 입니다. 시할아버님도 99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한 달 편찮으시고 가셨습니다.

실제로 피부과에서 진단한 아버님의 피부 나이는 69세라고 했습니다.

국내의 세 개의 공중파 방송에서 모두 출연을 원했지만 모두 거절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며느리임이 자랑 스럽습니다.

 건축을 전공하시고 교육청에서 정년 퇴임을 하신 큰 아주버님(66세)과 큰 시누이,아주버님(63세), 막내 시고모부, 큰 시누이님, 막내 시동생, 막내 시누이, 큰 형님, 시고모님들...대가족이지만 마음이 넉넉한 분들과 만나면 그 마음을 닮아서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이 매주, 또는 시간이 나는 대로 만나서 고친 사랑의 집입니다.

손재주 없는 남편은 힘들고 표시나지 않는 일만 했습니다.

우리 막내가 표시 나는 일을 한다며 부모님이 거주 하실  방의 벽을 모두 황토로 남편과 바르다가 손바닥이 다 까졌습니다.

" 아빠는  표시 나지 않고 힘든 일만 했네"

남편은 주로 큰 돌을 치운다던다, 오래된 양탄자를 태운다던가 황토를 채로 거른 다던가 하는 일 했으니 표시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친척이 남편이 열심히 일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집 입구의 대문을 큰 아주버님이 대나무로 손수 만드셨습니다.소나무가 [어서 오세요]하며 두 손으로 영접하는 형상입니다.^^

신발장도 ,마당의  큰 평상 두 개도 모두 큰 아주버님이 만드셨습니다.

수돗간 옆의 창고는 시누이 아주버님과 큰 아주버님께서 ,남편은 조수를 했습니다.

본래 있던 본 채 입니다.

큰 방을 미닫이 문으로 막아 �지요. 다락이 있고 부엌쪽으로 음식을 나르는 작은 문이 있습니다.

제비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둥지를 틀었지요.

신기한 것은 사람들이 살지 않던 10여년 동안엔 제비가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엔 둥지를 만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채를 투 룸으로, 입구의 집을 역시 투 룸으로, 외양간을 완 룸으로, 사랑채는 그냥 장작불을 때게 만들어서 가마솥으로 물을 끓입니다.모두 입식 부엌이고 200m를 뚫어서 수도를 집안 까지 들여 놓았습니다.

모든 집의 형태는 보존하고 모두 황토 흙을 채로 걸러서 안과 밖을 황토로 발랐습니다.

 오른 쪽에 보이는 집이 사랑방입니다.  왼쪽은 주방겸 다용도실입니다.

 사랑 방 을 열면 바로 보이는 밭이고 마루 밑에는 아주버님들이 직접 자른 장작이 쌓여 있습니다.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이 교육계에 계셔서 시고모님이 할아버님을 20년동안 모시고 사셨습니다.

마을의 논 밭의 대부분이 시댁 땅인데 수덕 초등학교만 나온 남편의 동창에게 맡겨서 농사를 부탁했습니다.

그 분의 고모가 수덕사 스님이었기에 우리 밭의 채소는 거의 다 수덕사에서 사갔다고 합니다.

마을의 여인들은 수덕사의 주방에서 일을 하곤 했습니다.

  집 입구, 오른 쪽의 집이 부모님이 거주 하실 투 룸입니다. 남편이 태어 난 방입니다. 안에는 북박이로 장롱을 짜서 넣었고, 다락을 만들었고, 입식 부억과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습니다.

침대도 큰 아주버님이 모두 손수 만드셨습니다.

왼쪽이 사랑방이고 굴뚝은 장작을 땔 때 나오는 연기가 나오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겨울에 사랑방에 장작을 때고  무명솜 이불을 죽 깔고 아버님 시누이님, 저, 남편, 큰 시누이 아즈버님 차례로 누워서 자고 나면 몸이 개운 합니다.

어머님은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시골에 자주 가지 않으십니다.

  비가 오면 이곳에서 평상을 놓고 식사도 합니다.

집 밖으로 가스렌지를 달아서 많은 양의 국을 끓일 수 있게 만들어 놨습니다.

4년전 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아버님의 지휘아래 조금씩 고쳐 온 집입니다.

저녁 식사는 대전으로 나와서 아버님이 한턱 내십니다.

형제들끼리 만날수 있고 우애가 좋으라고 생각해 내신 겁니다.

메뉴는 소박합니다.

4,000원짜리, 쌈밥, 돌솥밥, 추어탕, 보신탕, 삼계탕, 대전역앞에 있는 유명한 중국집 [태화관]에서 짜장면과 탕수욕을 ...중국인 사장님과의 우정이 50년인 아버님.

 마당입니다. 대 가족이 모이면 돼지고기 삽겹살 파티도 할  수 있게 아주버님이 화로를 대장간에 부탁을 해서 몇 개 제작했습니다. 참 숯 불위에 석쇠로 구어 먹는 삼겹살의 맛은 별미중에 별미입니다.

최고로 많이 모인 것이 40명입니다. 아버님이 꼭 숫자를 세어 보십니다.

대문 밖 공터에서 [캠프파이어]도 할수 있게 철로 된 용기도 제작했습니다.

지난 해 추석에 캠프파이어 해 봤습니다.

수도간에서 나오는 물로 동치미를 담그면 정말 꿀맛입니다.

작년 가을 에 이 마당에서 150포기의 김장을 밭에서 바로 뽑아서 담궜습니다.

셋 째인 저는 무조건 공짜입니다.

너무 맘고생, 돈 고생을 하며 살았다고 칭찬도 해주십니다.

 사당 앞에 노는 땅입니다. 화단으로 가꿀 예정입니다. 현재는 음식물 찌꺼기를 묻는 구덩이가 있습니다.^^

앞으로 채소, 꽃, 모두 심을 예정입니다.

 

 

  해뜰 때 마을 풍경입니다.

시골 집 마당에서 내다 본 마을 위로 해가 뜨는 모습입니다.

소나무 숲 그리고 오른 쪽에 있는 산이 [용봉산]입니다.

계룡산같이 무속인이 많이 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집 앞 대문 앞에서 새벽에 남편이 디카로 찍은 사진입니다.

남편은 [구미점] 출장일때 가끔 시골에 가지만 저는 거의 못 갑니다.

아버님은 평생을 새벽6시 30분에 아침 진지를 드신 분입니다.

교육계에 계셔서 가능 한 일 같습니다.

시골집에서 아침까지 자고 있으면 일찍 일어 나신 아버님이 대문을 열었다, 닫았다, 외등을 켰다, 껐다 하시며 신호를 보내시다가

나증에는 " 이제 일어 나란 말이여" 하십니다^^

  사랑방의 창문을 열면 멀리 신작로에 차들이 다니는 모습까지 모입니다.

시골집 앞에는 막히는 건물이 없고 모두 논과 밭이 펼쳐집니다.

전형적인 충청도 깡촌 ,외나리, 내나리, 복당리, 저드르, 이드르, ...동네 이름도 정겹습니다.

 갈수록 정이 드는 것은 그 곳에서 만나는 친척들이 좋고 , 그 사랑이 감사하고 보답을 하고 싶어서 입니다.

이곳에 남편 몫의 농지 1,000평이 있습니다.

절대 농지로 정해져서 농사만 지을수가 있습니다.

시 할아버님이 모두 농사를 지어서 일으킨 재산입니다.

저는 이곳이 참 좋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 가셔서 적적한 친정집인데 대가족이면서 남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시댁 어른 들을 존경 합니다.

57세의 셋째 며느리....장수 사회의 특징이랄까요?

이번 주에도 김치 두 통 새로 담가 보내시는 군요.

배추 재료만 5만원 어치였답니다.

대전의 어머님, 부산의 저, 나와 띠동갑인 막내 아가씨네, 막내 동서네, 안산 시누이님네,홍성고모님과 시누이님이 다 담궈서  큰 통으로 두 통 보냈습니다.

총각 김치, 물김치를 ........인복이 많아서 행복합니다.^^

 

살면서 차츰 다 갚아 나가야 할 사랑의 빚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