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일생 동안 아들과 세 번 이별을 해야 행복해 진다.
33살 즈음에 나는 [자기 실현]의 문제로 무척 갈등을 했다.
특히 작가로 등단하는 것이 꿈이었고 바로 그 앞까지 가 본 적이 있어서 늘 글쓰기에 목 말라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아주 똑똑하지도 , 모자라지도 않은 배운 엄마인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임신하자 [자녀교육]에 올인 하므로서 자기 실현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때 첫 아들이 유치원을 다녔다.
아이의 건강과 생활 습관, 예절, 남에 대한 배려 ,가족을 위한 양보를 늘 신경을 쓰며 교육했다.
내가 아들에 대한 최선의 교육은 [큰아들 대학 졸업까지 교육기]에 쓴 적이 있다.
1. 50%의 이별을 할 때.
아들이 재수를 해서 서울의 사립대학으로 유학을 떠 날 때 나는 마음에서 아들을 50% 이별을 하며 보냈다.
아들에 대한 집착의 끈을 그만큼 풀어 버린 것이다.
지금 30살이 된 큰 애는 일생에서 제일 겁이 났던 때는 혼자 서울로 갔을 때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태어 나서 처음으로 모든 일을 혼자 다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한 살 아래 여동생이 서울에 살고 있어서 주말이면 이모 집에 갈수 있고 나도 안심이 됐다.
대학 생활을 어떻게 보내는 가는 자주 전화를 해서 대화를 하며 알고 엄마가 대학 생활 때 못했던 점을 위주로 조언을 해주면 늘 좋은 결과를 얻었다.
2. 30%의 이별을 할 때.
아들이 공군에 입대를 할때 경남의 사천 [공군 훈련장]에 함께 갔다.
입대 전 날 그 동안 아들아이에게 마음 고생을 시킨 것이 미안해서 많이 울었다.
사업 실패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고, 남편과 자주 다투어서 마음 고생을 시켰었다.
1,700명이나 함께 입소를 하는 곳에서 아들이 적응 하지 못할 것이나 고생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의 다 현역으로 군에 다녀 오지 않는 가.
"엄마 ! 대학을 하나 더 다닌다고 생각 할래요. 나는 조직에는 잘 적응 하니까 큰 걱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엄마가 걱정이 돼요.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잘 하고 올께요."
아들을 훈련소에 남겨 두고 돌아 오면서 아들과 마음으로 30% 이별을 하였다.
자식에 대한 집착의 끈을 풀기 연습이었다.
3. 나머지 20%중에서 10%의 이별을 할 때
군 제대를 하고 나서 아들들은 엄마를 마치 여동생을 돌보듯이 대했다.
나도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 온 자식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강하게 생겼다.
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직장, 적성에 맞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큰 아들은 내가 기도 하고 바라던 것 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고, 성실한 직장인으로 변화해 갔다.
제일 먼저 출근하고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회사 숙소로 돌아 온다.
직장 동료 들과 학교 후배들이 잘 따르고 소개팅도 많이 시켜 준다.
언젠가 결혼을 할 것이다.
그 때 나는 나머지 20% 중에서 10%를 이별 할 것이다.
결혼을 하면 내 아들이면서, 한 여자의 남편이고, 사위이며. 직장인이기때문이다.
내가 큰 아들을 위해서 한 정성과 교육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들들을 키우며 나는 수많은 기쁨과 웃음을 선물 받았다.
그것으로 아들들은 이미 내게 효도를 많이 했다.
며느리가 어떤 아이가 올 지 모르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는 직장인 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능하면 손주는 내가 키워 주고 싶다.
물론 한 집에 사는 것은 반대이다.
아이가 3세까지 인성이 형성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든 일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가 키우고 싶다.
물어 보지 않았지만 장래의 며느리도 찬성 하리라 믿는다.
내가 아이들을 좋아 하고 . 교육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제 남편을 보면 알것이니까.
그리고 며느리는 백년손님으로 대하다가 차츰 차츰 대화가 통하는 친구같은 사이가 되고 싶다.
나 역시 시어머니와 그런 사이니까.
**아들에 대한 집착을 하면 할 수록 내가 힘들어 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이 바쁜 서점에서 일을 하는 지금의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