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를 안해 갔으면 욕먹는 것이 당연하지.
벌써 결혼 한지 30년이 지났다.
나는 혼수를 거의 해가지 않았다.
큰어머니가 해주신 장롱과 내가 산 냉장고, 시어머니가 사주신 그릇 10만원어치가 전부였다.
세탁기도, 가스렌지도 없었고..가전 제품은 냉장고 하나 뿐이었다.
나는 당시 결혼 을 잘 한다는 명문 여대를 졸업하고 4년간 교편생할을 했었다.
대학 다닐때는 4년동안 가정교사를 해서 번 돈을 모두 어머니께 드리고 하루, 식대와 차비, 커피 한잔 값만 타서 썼다.
교사의 봉급도 모두 어머니께 드렸다.
경기도에서 안정된 생활을 했던 우리 집은 내가 고 2때 모두 서울로 상경했다.
그때부터 하는 일이 잘 안되서 집도 처분하고 전세로 생활하다 ,어머니께서 시외버스 커미널 앞에서 조그만 식당을 해서 번 돈과 내가 드린 봉급을 모아서 작은 집을 샀다.
집을 사고 일년 후에 45세의 어머니는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 가셨다.
아버지와 운영하던 식당은 그냥 아버지가 사촌 여동생하고 계속 했다.
나는 경기도의 소도시에서 계속 직장 생활을 했는데 ,결혼은 생각 할 수가 없었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두번 째 만났을 때 결혼 신청을 받았다.
같은 학교에 여고와 대학 10년 선배가 있었는데 ,지금 결혼을 안하면 저 사람 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수가 없다고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유했다.
친정집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냐고....
그 선배도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결혼을 미루고 (당시37세) ...결국 결혼을 못했다.
남편은 당시에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교수가 목적인 사람이었다.
남편 집도 시아버님이 교직에 계신데 형제가 7형제나 되어서 집에 도움을 받을 처지가 못 되었다.
내가 4년 간 받은 봉급은 어머니께 드려서 친정 집을 사는 데 들어 갔다.
결혼 후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재산 상속을 할때 나는 동생들을 위해서 상속을 포기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2년 후에 세 동생을 두고 결혼을 하는 나는 정말 몸만 가지고 시집을 간 것이다.
친구가 하는 계에 1번과 2번을 들어서 60만원의 계돈을 타서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후에 24개월을 동안 계돈을 부었다.
한 살 아래 여동생이 해주는 대로 . 시부모 한복 한 벌씩만 하고 남자형제는 Y셔츠와 넥타이 한개씩 ,...그리고 그냥 갔다.
어머니가 안계시고, 친정 아버지는 이북에서 큰아버지와 월남을 해서 결혼을 하는 과정을 잘 몰랐다.
큰 집에는 자녀가 없었다.
결혼식에 폐백 드릴 때 두 팔에 걸치는 하얀 긴 천이 없어서 당일 날 사러 갔다.
같은 시기에 결혼 하는 대학 동창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집까지 사서 , 직장 생활을 하며 번 돈은 지참금으로 가지고 갔다.
결혼을 한 후 서울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다른 소도시의 남중에 근무하게 됐다.
결혼후 가끔씩 혼수 말이 전해서 들려 왔다.
[시 부모 이불도 안해오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명문대를 나오고 인물도 좋다더니 사실 별거 아니네]
[혼수가 너무 형편 없다]
나는 그 말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도 죽지 않았다.
내 자신이 혼수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대학까지 교육을 시켜 주셨고, 나는 교직을 가진 전문직 여성이니까, 동생들을 두고 결혼 하면서 ,무엇 보다 돈이 없어서 그냥 온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시댁 어른 들은 모두 인품이 좋다고 생각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늘 대했다.
사실 혼수에 대해서는 동서들이 제일 관심이 많을 것이다.
바로 위의 동서는 검사인 아주버니에게 친정 어머니가 먼저 혼담을 주선 했고 부자집 따님 답게 혼수도 잘 해 왔고 일하는 아주머니도 함께 왔었다.
나와는 아주 비교 할 수 없는 극과 극의 혼수 일 것이다.
나는 결혼 생활 30년 동안 그 형님이 부러웠던 적이 없었다.
남편은 혼수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고, 30년을 살면서 나를 선택 한 것에 감사하며 살았다.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혼수를 잘해 온 사람이나 아주 안해 온 사람이나 ,삶의 방식이 다를 뿐
각자 알아서 잘 살고 있다.
나의 다른 글에서도 수없이 나타났지만 시부모나 시고모님들, 대부분의 시댁식구들은 셋째 며느리인 나를 참 많이 좋아 해 주신다.
혼수를 안해 갔으니 뒤에서 안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나는 혼수보다 더 소중한 존재인 것을 살면서 보여 드리면 된다.
그 방법은 최선으로 공손하게 시댁 어른 들을 대하고 진심으로 좋아하면 세월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그 분들 눈에 내가 [보석]으로 보일 날이 온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
내가 결혼 할 당시인 1978년도 혼수 문제는 늘 문제가 되었다.
형편 대로 혼수를 해가고 친정부모에게 상처를 줄 정도로 많이 해 가지 말기를 권유한다.
30년을 잘 교육 시켜서 혼수까지 부담을 받고 ,거기서도 모자라서 결혼 후 사네, 못사네 해서 부모님께 불효 하지 마라.
남자와 사귀는 동안 시댁 식구를 잘 살펴서 , 혼수 문제로 계속 괴롭 힐 것 같으면 결혼을 하지마라.
결혼 하고 나서 혼수가 문제되어서 [이혼]까지 생각한다는 기사를 자주 본다.
남자를 선택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반성하라.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젊은 여성들은 배운 만큼 당당하지 못하다.
결혼 초에 몇 번을 말하다 그만 두는 게 일반 인들이다.
그많은 혼수를 요구 할 정도면 남자도 뭐 대단히 내세울 게 있거나 부자겠지.
그남자의 조건만을 본 바로 당신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시대가 다 그렇다고 하나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의 주변에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은 데 모두 자기가 초라 할 때 만나서 결혼 한 아내에게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아내에게 돌리고 있다.
복불복, 인과응보, 사필귀정이 인생의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