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지만 박씨 입니까?
출 퇴근을 할 때 지하철 이용을 많이 한다.
오후 조일 때는 1시에서 2시 사이에 두 번을 환승하며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한 낮인데도 지하철안의 분위기는 회색빛 우울과 쓸쓸함이 가득하다.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모두 직장이나 학교에 갔고, 무료 승차인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가득하다.
나 역시 60에 가까운 편이니 그 그림속의 일부지만 지하철 안의 수많은 얼굴들 속에 밝고 편안한 표정은 거의 찾을수가 없다.
각자의 힘든 인생을 겪어 낸 피곤함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 훈장처럼 표시가 나게 달고 있다.
이시간의 승객들의 특징은 거의 대화가 없다는 것....
왠만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관심이 없을 나이이기 때문 일까?
어느 날,역시 지하철로 출근을 하는데,자리가 없어서 나는 두 노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앞자리에 서있었다.
두 분 다 70이 넘었고 교육을 받은 표시도 나는 분들이었다.
남자나이 70이 넘으면 마른장작 같이 메마르고 윤기없는 피부와 자연스레 작아진 체격이 특징 같다.
무심코 스쳐 듣고 있는데 박씨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는가?
창 밖을 보며 대화에 관심을 같고 들었다.
"밀양 박씨는 원래 경주 박씨에서 갈라져 나왔어요."
하는 소리가 들려서 두 분을 쳐다 보았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니까 같은 소리를 한 번 더 하였다.
막내 아들이 기겁을 하는 나의 독특한 성격이 발동을 하였다.
"실례지만 박씨 되십니까?'
"아닙니다."
"그러세요. 제 시댁이 밀양 박씨입니다. 아버님이 족보를 중요시 하십니다. 밀양 박씨 족보를 만드는 분도 아버님께 여쭈러 오십니다. 박씨는 모두 한 자손이며 밀양 박씨는 경주 박씨에서 갈라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도 호적을 옮겨서 밀양 박씨 호적에 있지요. 우리는 밀양 박씨 규정 공파 26,7,8대 손입니다."
명륜역에서 내가 그 분께 말씀을 드린 후 지하철 안이 조용해 졌다.
다음 역에서 나는 내렸고 지하철은 그 분을 싣고 떠났다.
며칠 후 아버님(87세) 께 여쭤 보니 웃으시며...박씨는 모두 조상이 같으므로 박씨끼리 결혼을 하지 않는 다고 하셨다. 밀양 박씨는 모두 규정 공파에서 갈라져 나갔고, 규정 공파만 전국에 200만명이 넘는다고 하셨다.
나는 영천 김씨로서 우리야 말로 경주 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13대 손이라고 단 한 분 살아 계신 큰아버지(88 세)께서 말씀하셨다.
6.25 전쟁때 아버지와 단 두 분이 월남을 하셨는데 ,부모님은 오래 전에 돌아 가셨고, 자녀가 없는 큰아버지만 한 분 살아 계신다.
큰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수의사로 당신의 지식과 소신에 자신을 갖고 사신 분이다.
작년에 예산 시골 집에 여동생과 오셔서 일박을 하고 가셨다.
20년 전에 예산에 사 놓은 땅을 처음 보러 오시며 ,전형적인 농촌 집인 시골집에 처음으로 오신 것이다.
집안에 네 채의 집이 원룸, 투 룸, 사랑방, 안채, 그리고 사당.
우리 집의 사당은 다른 종가집의 사당과 사뭇 다르다.
아버님의 의사대로 백두산 미송이라는 소나무로 15평의 큰 마루 같이 지어서 ,여름이면 그 곳에서 잠도 자고 놀기도 하게 만드셨다.
사당을 제외한 모든 집은 모두 황토 흙으로 리모델링 하였다.
집을 황토로 만들고, 집마다 화장실과 욕실을 만들고, 심야 전기를 설치하고, 200 m 밑까지 뚫어서 지하수를 마당과 집들마다 수도 꼭지에서 나오게 만드었다.
600평 집의 담은 제주도 돌담같이 돌로 장식하였고 담주변에 연산홍 1000그루를 심었다.
사랑방 문을 활짝 열면 멀리 신작로에 다니는 차들이 보이는 아름다운 시골집.
그집에서 아버님이 태어 나시고, 시고모 5분과, 남편의 형제들이 태어 난 집이다.
친정 큰아버지는 당신의 지식과 재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키 작고 마음이 너른 시아버님의 충청도식 예우와 카리스마에 지셨다.
큰아버지는 시아버님께 "우리 집은 쌍 놈이야요. 제주도로 유배 갔다가 신의주로 갔시요"
솔직한 성격의 큰아버지에게 아버님은 웃으시며..."요즈음 세상에 양반, 상놈이 어디 있습니까?'
" 족보가 없어져서 내가 알아 보니까레 경주 김씨에서 갈라져서 나온후에 13대라고 기래요."
계속해서 조카 딸 창피하게 하셨다.
" 애 아버지래 얼마나 망나니인지 국민학교 6학년때 집에 있는 소를 장에 끌고 가서 팔았지 안?시요"
하시며 이미 가신지 20년이 된 아버지를 말씀하셨다.
다음 날 아버님은 10분 거리의 덕산 온천으로 큰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함께 목욕을 하시고. 우리들과 함께 삽교역까지 정중하게 배웅을 하셨다.
아버님은 큰아버지에게 정성껏 대하는 여동생을 방송에 알려서 효심을 전국에 알려야 한다고 계속 칭찬을 하셨다.
충청도 예산이지만 홍성이 더 가까운 시골집....깡촌...수덕사가 가깝고, 안면도가 가깝고...정말 봄이면 울긋 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이다.
그 깡촌에서 홍성까지 초등학교 6년을 다니시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의 배제 학교를 거쳐서 [연희전문학교] 로 유학을 보낸 시할아버님이나 ,학교를 다니면서 8년간 한 하숙집에 계셨던 아버님이나 모두 존경합니다.
그후 대전 ,충남에서 평생을 교직에 계시다 여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 퇴임 후 작은 회사를 지금까지 경영하시는 아버님!
셋 째 며느리인 나의 솔직함과 성실함을 인정해 주시며. ..."부산 애는 한다면 하는 애여."30여 년을 나의 장점만을 보아 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충청도가 좋고, 대전이 좋고, 예산과 덕산면 외나리가 좋고, 시집을 자랑하고 좋아하는 보기 좀 드문 독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밀양 박씨 족보에 오른 것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요즈음 소망은 대전에 가서 살며 친척들과 자주 접하며 사는 겁니다.
****큰아버지는 주말이면 찾아 가는 큰아들에게 갸우뚱하며 물으셨답니다.
"데데한 (좀 많이 부족한) 네 엄마가 네 할아바지 한테 사랑 받는 기 맞네?"
"예. 할아버지가 엄마 좋아 하세요"
"기래, 성희가 복이 많구만."
아이쿠 하하하......우리 친정 큰아버지 귀가 안들리시고, 몸도 많이 편찮으셔서 매주 가는 우리 큰애의 이름도 기억을 못합니다...."갸 공부 많이 하는 갸 ,성실하드만...."
매주 온나인으로 교육을 받고 [펀드 판매]자격증을 받느라고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버님! 큰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요.
제가 효도 할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