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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누나는 "시한폭탄"이고 작은 누나는 "간첩,스파이"

모과 2007. 7. 29. 12:45

내게는 연년생인 (55세)여동생과 53,49 세의 남동생이 둘  있습니다.

자랄 때 부모님은 장녀인 나를 제일 귀여워 해 주셨습니다.

제가 받은 교육은 요즈음 학생들보다 더 서구적이고 남녀 평등을 넘은 '여성 우대"교육을 받았지요.

경기도 파주에서 좀 큰 음식점을 했던 부모님은 기지촌의 교육적인 문제점을 일찍 깨달으시고

막내만 남겨 두고 외할머니와 서울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서울 청구동에 작은 집을 하나 사고 "청구 초등학교"에 전학을 시키고 '고대 법학과" 가정교사를 두셨지요.

 

시골에서 공부를 안하고 학교에 갔다오면 가방을 되는 대로 팽겨치고 들로 산으로, 냇가로 돌아 다니며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집에 와서 밥먹고 숙제도 하지 않고 쓸어 져 자곤 했지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하도 산만하고 장난을 쳐서   선생님은  " 너는 제발 전학을 가라" 하며 맨 앞자리에 말썽쟁이 남학생과 저를 앉혀 놓으셨지요.

 

서울역에 밤에 도착을 했는데 서울역 앞의 "아이디알 미싱"의 간판이 반짝이고 너무 화려해서 완전 "촌닭"인 저는 갑자기 가슴에 '불꽃"이 터지며 마음이 떨리며 가벼운 무서움이 생기는 설레임을 경험했습니다.

그때가 1962년도 입니다.

전학 간 학교에서 처음 느낀 것은 나의 "정체성' 바로 작은 충격이었습니다.

아! 나는 촌년이구나!

나는 몽실 언니 머리에 초등학교 교복을 입었는데 서울 아이들은 하얗고 참 이뻐 보였지요.

 

학습 지진아였던 나는 나이가 한 살 어리게 입학을 했었으니 다시 초등 5학년으로 전학을 했습니다.

과외 선생님이 무섭고 서울에 오니 친구도 없고 공부밖에 할게 없었는지 초등학교 내내 1등을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특히 수학은 "수학 박사"라는 소리를 졸업후 계속 들었습니다.

여동생은 나의 담임이었던 선생님을 만났는데 늘 듣는 소리가 "네 언니는 공부를 잘 했는데 너는 왜 그러니" 동생은 마음에 불만이 쌓여 갔지요.

엄마는 당신이 많이 배우지 못해서 교육열이 대단 한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을 자주 뵙고 외제 화장품을 선물 하였고 ...나도 공부를 잘 하니 참 신이 많이 나셨지요.

선생님에게 선물을 한 것은 졸업 식때 중국집에 선생님을 모시고 요리를 먹으며 알게 되었지요.

 

 

할머니와 살게 되니 자연 두 동생은 나의 '쫄병"같이  시키는 대로 착하게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53세의 남동생에게 보자기를 씌우고 화장도 시키며 웃고 놀고...

나중에는 모든 식구가 서울에 모여서 살게 되었는데(고2때부터) 지금 49세인 막내까지 모두 내 졸병이지요.

자다가 목이 말라서 깨면 아직 자고 있지 않은 동생이 물을 떠다 주고...시키는 대로 누나 말을 잘 듣는 버릇이 생겨서 이제 나이가 들어도 남동생 들이고 여동생이고 "방어 능력"이 전혀 없어서 나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큰 아들이 서울로 유학을 가서 4년 동안 매주 이모집에 가서 자고 푸짐한 음식을 대접을 받으며  이모의 정성과 사랑을 받고 지냈습니다.

한 날 아들이 웃으며 말하더군요.

"엄마 이모가 엄마는 성질이 나빠도 너 같이 착하고 성실한 아들을 낳았네, 나는 평생 언니에게 말로도 힘으로도 못이겨 봤다 그러데  "

    "하하하.그게 제 아들에게 할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너는 내 졸병이야^^

 

여동생은 사업 실패로 어려워진 내게 참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

마음으로 물질적으로....한 때 옷 가게를 했던 동생은 옷을 자주 사서 소포로 보내 주었습니다.

제가 입고 있는 옷의  90%가 여동생이 사서 보내 준 것입니다.

 

막내 동생은 어머니의 교육열으로 그 당시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머리가 좋아서 계속 일등릉 하였습니다.

고3까지 반장을 했었는데 고2때 그만 집안 의 기둥이었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 가셨습니다.

첫 입시에 실패를 하고 재수 중에 군대 영장이 나와서 군에 갔습니다.

제대 후 우연히 유통에 입사를 하였는데 성실, 창의력, 독함으로 현재 국내 큰 유통회사의 임원이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반은 부산 에서 일하고 반은 , 서울에서 일을 하는데  서울에 있을 때는 작은 누나 집에서 다닙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 저와 큰 동생이 결혼 을 한 후 작은 누나와 10년을 살았던 막내는 작은 누나와의 정 이 각별합니다.

 

내가 마트에 납품을 하고 돈이 힘들었을때 막내는 신용 대출로 두번 빌려주고 보증도 서 주었습니다.

그 고마움에 저는 20개월을 공부에 취미가 없는 조카를 위해서  일주일에 3번을 동생집에 가서 자고 조카를 지키다가 다음날 아침 조카들이 학교에 갈때 집에 오는 생활을 했지요.

 

아들들은 방학 때 마트에서 힘들게 일을 하면서도 큰 애는 일주일에 3번씩 영어를 ,작은 아들은 일주일에 2번씩 수학을 가서 가르쳐 주었지요.

 

빌린 돈의 이자는 지금까지 다 내가 내고 원금도 갚고 있습니다.

올케는 큰애의 기숙사비를 3년 간 내주었지요. 입학 할 때 등록 금도 내주었어요.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친정집의 재산 상속 때 저는 상속을 포기했습니다.

4년 간을 교편 생활을 한 급여를 어머니께 모두 드려서 집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빈몸으로 결혼을 했지요.

 

문제는 우리 큰 애가 인턴을 하고 있을 때부터 올케가 입사를 하면 바로 '신용대출"해서 빚을 갚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그럴 생각이었지요.

인턴 연수중이고 합격 후에도 신입사원은 6개월에서 1년이 지나야  대출이 되는 줄 몰랐지요.

어렵게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직무가 도저히 평생 전문가가 되기에는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만 두고 다시 새 직장 을 얻는 동안 아들아이의 마음 고생이 심했을  때, 올케는 전에 약속한 입사후 대출을 받아서 갚는 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동생에게 자꾸 말 하나 봅니다.

 

지금 대출 받은 돈의 1000만원에 대한 원리금 상환을 2년으로 나누어서 갚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최저 생계비로 살고 ,교육비와 이자를 내며 살고 있는 데 더 빚을 갚으라고 해서...

내가 문자를 보냈지요.

 

"물에 빠진 사람 살려내고 건져 준 값 내라고 하는 형국이다'

'너의 사회적 출세가 핵가족만을 위한 것이면 그 성공이 무슨 의미냐"

 

살면서 무슨 고통이던 찾아 오는 데 경제적인 고통을 겪을 때 많이 도움을 준 막내 부부가 늘 고마웠지요.

군에 간 조카는 며칠전에 수신자 부담 전화로 안부 전화를 해서 "고모 책좀 보내 주셔요. 책보다 안부 전화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막내에게 "큰 고모는 제2의 어머니다. 나는 부모님보다도 고모하고 더 대화를 많이 했다. 고모는 나의 생각의 길을 정리해 준 고마운 분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그냥 서서 조카애가 다가오면 만날 뿐 앞으로 나가서 그 애와의 만남을 자제 하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 부부의 교육관이 나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동생은 연애를 실패하고 평생 수녀같이 맑은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내게 의논하고 막내 동생의 근황도 알려주느라고 하루에 약 5~10번의 전화를  합니다.

막내 동생이 어느 날 술이 취해서 작은 누나를 안으며 ㅎㅎㅎㅎ

"모두 클 때 누나는 크지도 못하고 ..배만 나와서...아이구 큰 누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같고, 작은 누나는 큰 누나에게 다 말해주는 간첩, 스파이다"

하더니 쓸어져 잤답니다.

 

막내의 착한 심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누나 때문에 대출을 쾌히 해 준 것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네가 연봉이 얼만데 나한테 그러니?

형편 되는 대로 다 갚을 테니 네 와이프 잘 이해 시켜라.

원래 심성이 착하고 검소한 사람이니 네가 하기 달렸다.

 

아니면 정말 "시한 폭탄"터진다.

너는 나의 영혼한 졸병이다.

 

앞으로 30년 가량 살아야  할 인생!

잘지내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