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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의 정직원이 되기위해서 계약직을 포기한 막내 아들

모과 2007. 7. 25. 03:31

우리 가족에게 대형 마트는  고마운 곳이면서 동시에 원망의 장소이다.

큰 아들은 수능이 끝난후 부산의 사상에 있는 대형마트 그 넓은 매장을 5명의 알바생들 속에 섞여서

청소를 다 했다.

밤에 집에 돌아 온 아들은 딱딱하게 굳은 살이 생긴 발바닥에 여기 저기 물집이 생긴 발이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나는 잠이 든 아들의 발바닥을 손으로 쓸어 주며 아픔을 달래야 했다.

그 당시  알바의 시급이 2,700원이었는데 아들은 배가 고파도 밥을 사 먹지 않고 집에 와서 먹었다.

밥 한그릇이 두 시간 알바를 한 가격보다 좀 적은 돈이었는데 힘들게 일 한 것이 생각나서 돈을 쓰지 못하면서도 급여를 받으면 다 에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용돈을 타서 썼다.

 

그후에 군 입대 하기전에 6개월을 복학하기 전에 6개월을 그 마트의 "복식 잡화"에서 일을 했었다.

마트의 후방은 여러 가지 물건으로 비좁고 미로같이 직원 한 두 사람이 다닐 정도의 통로만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재고 조사를 할때면 그 난방도 되지 않는 후방에서 밤을 새고 조사를 했다.

속옷과 양말등 500종이 넘는 것을 다 조사했다.

발바닥은 굳은 살이 굳게 박혔고 종아리에는 알통이 생겼지만 한번도 그만 다니겠다는 소리를 못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새학기가 되면 용돈을 썼고 학기 중에는 공부에 전념하여서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마트에 6개월을 다닌후에 큰 아들은 "아르바이트는 이런 사람 같아야 한다"고 선발 된 두사람 중에 한 명이 었다.

 

이제 큰애는 먼 길을 돌아서 너무 힘든 여정을 마치고 제 적성에 맞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신입 사원 연수를 마치고 은행에서 "사령장'을 받는 데 그 동안의 삶이 너무 고달파서 울음이 쏟아져서 주체 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고 한다.

지도 선배나 동기들은 그간에 정이 들어서 헤어 지는 게 섭섭해서 우는 줄 알고 위로를 많이 해 주었단다.

 

막내 아들 역시 수능이 끝나고 형이 다니던 마트에서 알바를 하면서 마트의 활기가 좋다고 평생 직업으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과였던 막내는 재수를 하여서 문과 "경영학과"에 진학을 했다.

막내 역시 군대에 가기 전 6개월과 복학 하기전 6개월을 그 마트에서 "주류, 조리제안 .가공"에서 일을 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마트에서 파트타이머로 일을 하던 막내가 어느 날 심각하게 의논을 했다.

"엄마! 나 복학을 포기하고 마트에 정직원으로 남을 래요.대학은 전문대 야간으로 옮기면 되요"

"내가 이제 2학년에 복학을 하고 3년후 마트는 더 이상 지을 데도 없고 지방국립대학교 나와서 심한 경쟁에서 이길수가 있을까요? 고졸,정규직으로 남으면 진급이 4년 늦는데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마음 한 켠에서 아픔 같은 게 올라 왔지만 표현을 하지 않고 좀 생각을 해 보자고 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형과 겹쳐서 복학을 미루고 마트의 "나이트"에서 밤새 일하고 있는 막내 아들.

 

며칠을 여기 저기 의논을 하니 대학을 졸업하고 마땅히 취업이 되지 않는 자식을 가진 부모는 모두 찬성이었다.

막내도 마음을 굳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규직이 없어지고 2년간 계약직을 한 후에 정규직 시험을 보는 것으로 법이 바꼈다고 했다.

파트타이머 중에서 1,2등을 해야지 계약직   직원이 되는 자격이 있었다.

막내는 그 조건에는 들었다.

 

"영원히 졸병이다"라며 고졸로 마트의 점장까지 된   막내 동생이 복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 마트에 들어 갈려면 정말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 가는 것만큼 어렵다.

50명 채용하는 데 5500명이 지원을 했고 .가장 어려운 것은 "영어로 에세이"를 써야 하는 것이다.

 

지금 막내의 목표는 내년 여름방학에 국내 최고의 백화점, 마트의 인턴을 하는 것이다.

작년에 200명이 인턴을 했는데 195명이 최종합격을 했던 회사였다.

큰 아들이 자기가 너무 오래 동안 알바를 해서 "운전면허"도 없고 자격증도 없다고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고 서울로 오라고 했다.

서울 가서 대형마트의 (신세계, 이마트  삼성테스코, 롯데마트, 편의점등) 조건에 맞추려는 공부를 하고 있다.

지방 국립대학생은 몇명 뽑지 않으니 긴장이 되고 힘든  일이다.

그래도 막내 학교에 와서 "취업 설명회"를 해서 열심히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 일년은 서울 학생과 경쟁 할 수 있는 스팩으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열심히 하고 있다.

 

그 사이에 남편은 그 마트에 "시식을 하는 제품"을 납품을 하다가 생전 처음 빚만 지고 1년 6개월만에 접었다.

새벽 2시면 일어 나서  구미에 가서 인천 공장에서 오는 제품을 받아서 구미의 대형 마트부터 물건을 입고장을 거쳐서 매장에 진열까지 하면서 부산까지 와서 일을 마치면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그동안 잠이 오는 것이 무서워서 먹은 것은 우동 한 그릇.....한 달에 600만원씩 적자였다.

일을 포기하고 정신이 든 다음에 보니 처음 부터 망할 조건으로 시작을 한 것을 알았다.

 

그 사업이 망한 후유증으로 집에 가구에 압류가 들어 와서 그냥 나왔다.

시식을 하던 아주머니들은 모두 다른 마트에 다시 취업을 했다.

우리 부부는 둘다 신용 불량자가 되었다.

은행빚과 카드 빚이 대부분인데 90%가 아주머니들 급여를 주기위해서 진 빚이 눈덩이 같이 이자가 붙었다.

그 전에 나는 한 은행의 최우수 고객이었다.

카드회사의 직원이 빚 독촉을 하러 우리 집을 방문했다가 오히려 위로를 해 주고 갔다.

일을 마치고 새벽에 와서 자고 있는 막내를 보더니 잠이 깰까 미안하다고 하며 조심스럽게 돌아 갔다.

 

온 가족이 힘든 시간을 보내다 우여 곡절 끝에 남편이 지금의 회사에 취업을 했고 신용회복위원회에 가서 상담을 하고 신용 회복 중이다.

 

나는 전국의 10여 개의 대학을 돌며 책을 팔았고 그 젊은 이들과  대화하며 지내는 바쁘고 고단 한 생활이 울화병을 고치게 해 주었다.

지금도 한 달에 100만원이 넘는 돈을 빚을 갚고 있다.

 

내가 납품을 했다 망한 마트의 서점의 월급 점장이 되어서 지난 날을 돌아 보니 고난이 왔던 14년의 기간은 어쩌면 우리 가족이 단결하고 사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기간 이었던 것 같다.

 

마트에서 일을 하면서 보니 일 자체가 단순하고 큰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다.

점점 정직원을 줄이고 파트타이머나, 계약직을 쓰는 것은 경비 절감 때문이라고 들었다.

정직원 채용은 기획이나 연구등 고급 두뇌가 필요한 파트만이 채용하므로 입사 시험이 그렇게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막내 아들을 마트의 정직원을 만들려고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해운대의 카르프가 "홈에버"로 바뀌고 큰 아들과 함께 가 보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가 60이 넘은 고운 분이셨는데 알프스 소녀 같은 앞치마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청소를 하시는 아주머니도 같은 복장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데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속 내용을 좀 알고 있다면 잠시 지켜 볼수 있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100%나쁜 사람이 있을 까?

홈에버 사장은 왜 망해 가는 카르프를 인수했을 까?

 

내가 보는 관점은 나의 하나님이 도와 준다는 그의 믿음은 그의 욕심일 뿐이었다.

그의 잘못은 과욕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욕하듯이 자기 혼자서 돼지같이 잘 살자고 작정하고 자기의 하나님과 세상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고 행동을 했을까?

"홈에버"에 가지 않는 다면 그 마트에 납품하는 수 많은 납품  업자들과 테넌트(임대매장) 에 있는 업자들의 실패는 누가 보상 해 줄까?

 

"홈에버"는 장소 빌려주는 비용으로 매출의 13%~35%까지의 수수료를 받고 있었겠지.

"홈에버"에 입점 해 있는 영세 상인 들이 제일 큰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홈에버"가 망하면 좀 더 힘이 있고 돈이 많은 재벌이 인수 하겠지.

 

매달 수백만원씩 손해를 보는 상인의 피말리는 고통을 당해 보았나?

퇴사를 해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자식에게 부탁하여서 신용대출을 받아서 월세 아파트로 이사한 사람이 바로 나이다.

 

나는 이제 막내만 취업을 하면 걱정이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언감생심  내가 점장으로 취업이 될줄을 몰랐다.

 

그것은 죽을 각오를 바꾸어서 열심히 살아 온 내게 신이 준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일 주일의 휴가를 하루 종일 잠난 자다가 간 큰 애가 이런 말을 하고 갔다.

"14년 전 그때 엄마가 우리를 버렸다면 아마 나는 자살을 했을 거야"

 

그랫지 하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함께 죽자고도 ?지.

우리 막내가 자장면 배달을 하더라도 살겠다고 해서 정신을 차렸었지.

 

이제 아들들이 커서 30세, 27세가 되었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자주 들린다.

"그 사람 살만 해 지니까 죽었다"고

 그 사람만이 죽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책임이 다 끝났을 때가 살만 해졌을 때가 아닐까?

 나는 그 말이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팔할이 의리와 책임 이라고 믿으므로......

그 중에서 자식과의 의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