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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를 황소와 한 시고모님 이야기

모과 2007. 4. 24. 13:54

시골 고향집에 시고모님들이  모였다.

며칠전 시할머니 제사에 내려 온 서울 고모도 우리와 함께 시골에 갔다.

옆 마을 "갯골"에 사는 큰 고모도 안산의 형님이 들러서 모셔 왔다.

 

홍성에 살고 있는 "가르개"고모님은 남편이 가서 모시고 왔다.

옆 마을 "가루개"로 시집을 가서 가루개 고모라고 부른다.

 

우리 고향집 마을은 "나바시"라고 부르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예산군 덕산면 외나리이다.

나씨와 박씨의 집성촌이었기에 "나박소" 를 충청도 사투리로 그리 부르게 된 것 같다.

주소는 예산 군이지만 홍성에 더 가까운 동네이다.

 

마을 어귀에 "수덕 초등학교"가 소박한 모습으로 있고 집에서 차로 10분도 안되는 거리에 "수덕사"와 "덕산 온천"이 있다.

 

큰 아주버님 보다 한 살 위인 막내 고모님만 바빠서 못 내려 왔다.

 

시골집의 안채는 130년이 되었고 , 사랑채는 98년, 지금 큰 아주버님이 붙박이장과 다락을 만드시는 집은 큰 아주버님의 나이와 같은 65년이 되었다.

 

그 집에서 돌아 가신 할아버님이 태어 낳으시고, 시아버님이  태어 낳으시고 , 시고모님들, 그리고 남편의 형제들이 태어 낳았다.

 

아버님은 4년 전 부터 매주 일요일이면 고향집에 내려 오셔서 고치고 있다.

큰 아주버님은 건축과를 나와서 교육청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을 하였다.

근 10여년을 비워 둔 시골집에서 혼자 주므시며 조금씩 조금씩 손수 집을 고쳐 왔다.

 

시아버님은 평생을 교직에 계시다 교장으로 정년 퇴직을 하시고 현재까지 중소 기업을 직접 운영하고 계신다.     85세의 연세가 무색 할 정도로 건강하시고 카리스마가 있다.

 

그래서 아버님은 매주 토요일에 시골집에 가셔서 공사하는 현장을 지키신다.

안산에서 서해안 고속 도로를 타고 오면 1시간 반이면 시골집에 오므로 안산에 사는 큰 시누님도 아주버님과 거의 매주일 내려 온다.

 

우리는 합세한 지 일년도 안 되지만 못 갈 때가 더 많다.

 

집 울타리는 제주도 돌담집 처럼 인부를 사서 600평의 집의 둘레를 멋있게  돌로 쌓았다.

울타리 안쪽에는 "연산홍" 1,000그루를 빙 둘러서 심었다.

 

울타리 안에는 모두 네채의 집이 있는데 세채는 모두 황토방으로 만들었다.

담안의 한 쪽에는 15평의 "사당"을 지었는데 마치 강당 같이 넓게 백두산 미송으로 내부를 만들어서

은은한 향내가 난다. 

 

아버님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사당 하면 위폐가 모셔져서 북쪽에 음침하게 느껴지는데 우리 집은 강당같이 생각하고 여름이면 모여서 놀고 잠도 잘 수 있는 친근한 장소로 지었다"

 

우리 시댁은 위폐를 "수덕사"에 모셨다. 그래서 사당에 위폐가 없다.

 

모기장 샷시와 안채에 붙은 창고는 안산 아주버님이 지었다.

 

네 채의 황토방도 안산 아주버님, 남편, 우리막내가 황토벽을 발랐다.

 

집의 대문 옆의 아기 자기한 대나무 문과 사랑채의 신발장, 10명정도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밥상 두개와 목침 약20개는 큰 아주버님이 만들어서 집집마다 하나씩 주었다.

 

집안 구석 구석 형제의 손이 안 간 데가 없다.

 

아버님의 깊은 뜻은 다른데 있다.

 

형제들끼리 자주 만나야 혈육의 정을 더 느끼는데 당신이 떠나고 나면 남남 같이 지낼 것을 염려 해서 시작을 하셨다

 

일요일에는 대전으로 돌아 와서 ,시골집에 가지 못한 막내 시누이와 시동생 가족을  오게 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

메뉴는 삽겹살, 게장백반, 칼국수, 추어탕, 중화요리, 쌈밥.....등 화려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님이 매주 사시고  있는데 자식들이 자청해서 번 갈아 사기를 바라 시는 것 같다.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 가서.....

 

네채의 집에는 사랑채는 아궁이를 그대로 두어서 장작으로 불을 때서 자고, 외양간이던 바깥채는 주방겸 식당이다.   원 룸 형식으로 주방, 화장실이 있다.

 

본체인 130년된 집은 투 룸으로 만들었고 주방과 화장실을 입식으로 만들었다.

 

지금 마무리 단계인 65년 된 집은 투 룸인데 부모님이 귀향하면 사실 집이다.

황토로 벽을 바르고 백두산 미송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창문을 열면 멀리 신작로에 다니는 차가 다 보이고 마을 입구까지 의 논 밭이 시원하게 보인다.

 

 

시골집의 저녁 식사는 옛추억을 떠 올리게 하는 것 같다.

 

짠지(무를 소금에 재 둔 것)에 쌀 뜨물을 붓고 국을 끓인 것 과 "머위 순"을 데쳐서 쌈장에 먹고,

얼마전에 동네에서 잡은 돼지고기를 푹 삶아서 수육과 김치 찌개를 푹 끓이고...

큰 형님이 만들어 보낸 "어리굴 젓"과 "조개젓"...가루개 고모가 만든 "고추 간장 절임","미나리, 씀바귀 나물 무침"......오손 도손 느리게 오가는 정겨운 대화들...^^ 충청도잖유^^

 

밥을 먹는 사이에 안산 형님은 누릉지를 만들어서 식사후에 돌리고....

 

맏사위인 안산 아주버님은 어느새 커피 당번이 된지 모르겠는데 식사후 늘 커피를 타서 돌린다.

64세의 그집에서는 귀한 종손인데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87세의 갯골 큰 고모님이 집안의 큰 누나의 위엄이  가득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말씀을 하였다.

 

"3대 독자였던 우리 동생은 얼마나 귀했는지 몰라. 밥을 먹을 때 아버지가  인삼을 대나무로 긁어서 얼른 꿀에 찍어서 먹였지."

아버님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 오른다.

10살때의 소년의 모습이 상상 되도록...

그때 얼른 홍성 고모가 말대꾸하듯이 조그맣게 중얼 거린다.

"그래도 다같이 오래 살고 있어"

이 고모님 부터 마을 입구에 "수덕초등학교"가 생겨서 학교를 다녔단다.

 

아버님은 홍성의 초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서울의 배재 학교와 연희 전문 학교를 졸업을 하셨으니 참으로 대단 한 할아버지의 교육열이었다.

할머니는 시계도 없었던 그 시절에 별을 보고 시간을 추측하여 밥을 지으시고 ,비오는 날에는 아버님을 업어서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서울 고모가 말을 이으신다.

"지금같이 남자 여자가 어디 밥을 같이 먹어. 아버지 밥상은 쳐다 보지도 못했지."

 

"부자 지간에도 겸상은 안했지. 그런데 조손간에는 밥상을 함께 받았지. 그래서 술은 할아버지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게여.' 아버님의 말씀이다.

 

홍성의 가루개 고모가 "언니가(돌아 가신 시어머니) 하루 걸이 걸려서 ..."하니까 큰 아주버님이 나를 쳐다 보며

"하루 걸이가 무었인지 아셔요" 하였다.

"하루는 아프고 하루는 아프지 않은 것 아니예요?"하니 다시 홍성 고모님이

"학질이여. 쳐다 보기만 해도 옮는 다는 병이여. 갑자기 OO아제가 나를 번쩍 들어서 외양간의 황소에게 입을 맞추잖아."

"호호호 고모님은 첫키스를 황소하고 하셨네요."내가 말했더니

 

모두 하하하하 합창으로 웃는다.

 

"하루 걸이는 놀라야 떨어진다고..그랬다잖여. 언니를 멍석에 말아서 마당에 누여 놓고 황소를 끌고 지나가니까 신기하게도 황소가 느리게 걷더니 언니를 밟지 않고 넘어서 가데."

 

그러더니 큰 아주버님을 쳐다 보며 ...

"육이오가 터졌는데 언니는 OO(남편은 50년생) 를 갖어서 배가 이렇게 나왔는데 OO(큰 아주버니)를 업고 산위로 뛰어 도망을 갔지. 종손이니까 귀중하니까 업고 뛰라고 해서....나중에 나는 찾지도 않고 종손 없어졌다고 난리였다는 구먼..." 모두 하하하 호호호.....

 

"고모들이 하도 많아서 하나 없어져도 몰랐지" 큰 아주버님이 웃으며 대답을 했다.

 

식사후에 한편에서는 남편과 안산 아주버님이 바둑을 두고, 한편에서는 고모님과 시누이님이 점 100의 고스톱을 치고 있다.

 

아버님은 미리 불을 때 놔서 따뜻한 사랑방으로 주므시러 가시고....

나는 고스톱의 룰을 모르니 홍성고모에세 3,000원을 투자해서 이익을 공동 분배 하기로 하였다.

 

다음 날 남자들은 뒷곁의 길을 시멘트와 돌로 마무리 하는 동안 여자들을 "덕산온천'에 데려다 주었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원탕'을 외라리 주민인 V I P 카드로 4,000원에 입장을 하였다.

 

82세의 시고모님이 수건으로 수줍게 몸을 가리고 한증막에 들 어가서 또 가리고 앉으셔서 내가 웃었더니

 

"누구나 있는 것을 뭐이 잘났다고 벌리고들 앉아 있나?"

모두들 고모님의 말씀에 웃으며 다른 나라의 혼욕 문화를 이야기 하고 웃었다.

 

온천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5,60대의 여성들이다.

여기 저기 아파서 온 사람들이다.

 

2시간만에 데리러 온 남편의 차로 돌아 오는 데 길 양쪽에 가로수는 벚꽃이 한창이다.

남편이 시골이 좀 추운 것 같다며 연산홍도 봉우리채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벚꽃길 밑으로는 개나리가 한창이고 ,옆 언덕에는 분홍색 꽃잔디와 진달래와 연산홍이 어우러져있다.

꽃 터널을 지나며 나도 모르게 동요가 떠 올랐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 대궐  그 속에서 살 던 때가 그립습니다."

 

수덕사 입구를 지나는 길엔 수백년 묵은 소나무 숲들, 야산엔 벚꽃, 진달래....나무잎은 아기 손마디만한

연두색 풀잎들.....

수덕초등학교옆으로 들어서면 "범죄없는 마을 " 간판이 있고 구불 구불 마을 길은 대부분 외라리 박씨문중에서 만들었다는 "보건지소장"님의 말이 떠 올랐다.

 

길 왼쪽엔 모종을 기다리는 벼의 어린 잎들이 잘 정돈 된 논에 일열로 정돈 되어 있고 오른쪽 야산엔 수줍게 숨어서 피어있는 옅은 분홍색의 진달래 무리가 옹기 종기 모여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태어 나서인가 마음들이 착하고 넉넉한 시댁 어른들과 형제들....

우리 시댁은 시고모와 시누이들이 나를 포함한 며느리들 보다 마음밭이 넉넉하고 착하다.

이것은 나의 혼자 생각이 아니다.

 

아름다운 고향, 포근한 고모님들, 누나를 가진 남편은 보이지 않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다.

나의 아이들이 찾아 갈 수 있는 시골집이 있음에 나는 늘 감사를 한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부터 여성 우대 교육을 받은 나는 시댁의 여성들이 한없이 존경 스럽다.

독특하게 나만 바른말을 잘 하는 별난 며느리인 줄도 안다.

 

그 독특함을 인정해 주는 시댁의 어른들의 심성이 대단하다.

그리고 존경한다.

 

아쉬운 점은 내가 아직 블러그에 사진 을 올리는 방법을 모르니 조만간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시골집 풍경을 올리겠습니다.